2009/05/03 17:06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여도 이가 하늘의 뜻과 어긋남이 없는 경지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강길님의 책을 보다가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발견한 것 같아서 기쁜 마음에 적어둔다.


언제나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한 상황에 민감하라.
이것은 <나의 실존>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여건>에 대한 가능한의 객관적 분석과
이에 대한 최선의 합리적 판단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이에 대한 계속적 수련을 쌓는 것이 바로 만무滿無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다.

정강길,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 신학, p259

Posted by Sunny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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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6 21:58
1. WHY : 왜 타인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

아직까지 이 질문에 대해 확신에 찬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진화론에서는 이타주의를 상호호혜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이 설명은 마더 테레사의 헌신적인 사랑을 설명하지 못한다.
마더 테레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중에 무엇을 받기 위하여, 또는 천국을 가기 위하여 사랑을 베풀지는 않았으니까.
성서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 계명을 주셨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그런데 왜 그런지는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_-;;
불교에서는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로 空을 말한다. 우주의 만물은 각기 존재하지 않고 연결되어 있으므로 다른 생명을 사랑하는 일은 곧
자신을 사랑하는 일과 같다고 말한다.
정강길 선생님 말처럼 신의 장대한 계획 - 만인을 위한 세상- 을 실현하기 위해, 즉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함일까?
음... 또는 계몽적 관점에서 만인은 평등하므로 모든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타인을 위해야 한다는 걸까?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한다면, 나에게 가장 와닿는 설명은 불교적 설명이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으니 타인을 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을 택한다 하더라도 나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이 대치될 때 타인의 이익을 선택할 명분이 되지는 못한다. 타인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것이므로 타인을 위하는 것이지, 나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이 반할 때마저도 굳이 나를 희생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대체 고통받는 생명을 위해 나를 버려야 하는 이유가 뭘까?!

사람 노릇하면서 사는 게 당연하지, 고통받는 생명을 보면 도와줘야 하는게 인지상정! 이라고 하신다면 나도 물론 동의.
하지만 그게 다란 말인가. 진화론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감정의 흐름이 그러하기 때문에 남의 고통을 보면 덜어주어야 한다는 건가.
이쯤되면 남편의 다소 씨니컬한 주장처럼 '어차피 지구는 언젠가 없어질텐데, 왜 굳이 모든 생명이 행복하고 평화로워야 하는건데? 사자가 물소를 잡아먹는게 당연한거야. 잡아먹히는 물소는 행복하지 않잖아. 인간 세상도 그래. 세상이 원래 그런거야.' 라는 말이 나오려 한다. -_-;;
** 취소선 그은 윗 문장은 제가 남편을 오해하고 적은 무지의 소산이예요.  남편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수정합니다. 미안해 남편- 내가 졸지에 남편을 살 의욕없는 허무주의자 & 회의주의자로 만들었네. 사실 남편의 저 말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남을 도우면서 살아야지'라는 뭇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했던 말이었습니다. 남편은 타인을 도와야 하는 이유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과 나는 경계가 없기 때문 - 모두 연결되어 있음- 이라고 굳게 믿고 있어요. 제가 그런 남편의 삶의 태도를 무시한 채  제 멋대로 남편의 말을 확대 해석했네요. 이 포스트 보고 앞으론 제 블로그 감시체제로 들어가야 겠다는 남푠-. 정말 미안해용!

이 문제는 '선과 악'의 시초와도 관련이 되는 것 같다. 타인을 위한 삶이 선이라고 느껴지는 이 감정은 단순한 사회화의 결과일까, 아니면 신의 존재 때문일까.

왜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아시는 분은 답글 좀 달아주세요. 나도 개과천선 하고 싶어요.

* 덧붙이기 : 나쁜 짓하면 지옥에 가니까 착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건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주신다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기에 이런 종류의 논의는 애초에 제외했음.


2.  HOW : 타인을 위한 삶은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WHY에 대한 대답이 나왔다고 치자. 타인을 위한 삶은 바람직하다는 답이 나왔다. 그리고 그 이유는 만인이 평등하게 행복하길 원하는 신의 뜻이라고 하자.
(선의 시초를 계속 거슬러 가보면 막판에는 신이 언급되는 것 같다. 이 또한 확실하지 않지만.)  앞으로 이어질 내용은 정강길 선생님의 저서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 신학> 을 보고 상당히 감명받은 부분이라 옮겨 놓으려고 한다.

신은 모든 생명이 행복하길 바란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이러한 신의 뜻을 깨닫고 있지는 않다. 많은 인간이 고통받는 생명을 도우려 하지도 않거니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만 바빠 고통받는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나 인내심 강한 신은 끊임없이 인간을 설득 중이다. 저 많은 고통을 보라고. 그리고 나와 함께 모든 생명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자고 속삭이면서. 신이 인간을 설득한다고 한 이유는 인간에게는 선택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해도 인간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세상은 신과 인간이 더불어 만들어 가는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개념은 '우선성의 원리 principle of preference'이다. 신은 모든 생명에 보편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통받는 생명을 그렇지 않은 생명보다 우선시 한다. 만약 고통받는 생명과 그렇지 않은 생명에 똑같은 사랑을 준다면 여전히 불균형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모든 만물이 행복해지기 위해 일시적으로 고통받는 생명을 우선적으로 돌보는 것이다. 이를 정강길 선생님은 우선성의 원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앞서 내가 언급한 '타인을 위한 삶'이란 정강길 선생님 입장에서는 우선적 민중 preferential minjung을 위한 삶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제까지 언급한 신과 인간의 관계를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신의 본성                               +                 개인의 결단                        =       우선적 생명을 위하는 삶
(만물을 위하는 보편적인 사랑 & 우선성의 원리)        (깨달으라는 신의 계시에 대한)         (궁극적으로는 모든 생명의 행복과 평화)




Posted by Sunny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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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5 15:58
난 오랜 시간 성당에 다녔었고 지금도 교회 예배를 나가지만, 마음 한 켠의 찜찜한 구석을 숨길 수 없다.
그 찜찜함은 '왜 애초에 신이라는 존재를 상정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에서 나온다.

전지 전능하고 선하신...이라는 신의 특성 또한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신 그 자체에 대한 의문이다.
자신에게 간절한 소망이 있는데 그 소망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기도를 하는 대상으로서의 신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또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을 그저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성경 구절을 근거로 믿기에는 매우 부족한 느낌이다.
그렇다면 직접적인 체험은 어떠한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하나님 체험' 은?  
하지만 나에겐 그러한 체험도 의문 투성이이다. 그것이 정말로 신적인 체험인지 아닌지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굳이 신을 상정하지 않고도 그러한 체험을 심리학,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러한 하나님 체험을 정말 신적 체험이라 말할 수 있을까?
현재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뇌과학을 바탕으로 설명되지 않을까?!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이성을 모두 소진하고 나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영역이 있을 때,
그 막다른 지점에 이르러서야, 그 때서야 '그 어떤 것(신)'이 있다고 조심스레 얘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게 나의 생각이다.
(덧붙이자면, 나는 신적인 영역이 존재한다 해도 그 영역을 100%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성으로 전혀 알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에는 쌍수들고 반대한다. 신적인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포함하면서
초월하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능력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이러한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것이 '과정신학'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한번 공부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 세기연의 홈페이지를 돌아보다가 <무신론 진영이 설명 못하는 난점>이라는 글을 보았다.
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자신의 철학에서 애초에 신을 가정하고 논의를 진행한 것이 아니라,
논의를 진행하다보니 불가피하게 'X'라는 존재를 설정해야만 하는 논리적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X를 신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그 불가피한 논리적 상황이 무엇이었을까? 정강길님은 그 상황을 1. 우주의 창발성(novelty)과 2.질서와 혼돈의 대비되는 느낌의 시원 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주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사건이 계속 일어난다. 기존에 없었던 새로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무에서 유가 나오는 걸까?
우리가 질서와 혼돈을 구별하고, 그를 대비시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데 그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X(신)'를 제시하고 있다.

음..
그렇다면 난 이게 또 궁금하다.



그 X는 어디에서 온걸까?




하하하...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음....
도대체 이 세계의 근원은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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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ny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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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9 19:02
1. 한 스님의 강의

유튜브에서 한 스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불교의 깨달음, 즉 '있는 그대로를 올바르게 아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내용이었다.
요즘 배우고 있는 부분과도 관련이 있어서 아주 흥미롭게 봤다.



스님이 말씀하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실제의 세계는 내가 바르게 인식하던 잘못 인식하던 나의 의식과는 상관 없이 알아서 돌아가고 있다. 만약 내가 실재를 잘못 인식하고 있다면 두가지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첫째, 잘못된 인식이지만 이로 인해 크게 문제가 없는 경우
둘째,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는 경우

첫번째의 경우, 법륜 스님이 드신 예는 농부의 예이다.  A라는 신을 믿는 농부는 농사가 잘될 때 자신이 A를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B라는 신을 믿는 농부는 자신이 믿는 신 덕분에 농사가 잘 되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농사는 애초에 농부가 믿는 신과는 관계가 없다. 농부가 A라는 신을 믿던 B라는 신을 믿던 농사는 실제 세계의 법칙대로 지어진다. 농부의 예처첨, 인간은 하나의 사상, 종교, 철학에 갇혀 있을 때 실재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착각 속에 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착각은 농사를 짓는 데에 크게 지장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두번째의 경우처럼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예상하지 못한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는 일도 많다. 이는 마치 쥐가 살려고 쥐약을 먹었지만 죽는것과 같다.스님꼐서 두번째의 경우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이 부분은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설명을 덧붙이자면, 아마도 우리가 자신이나 타인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생기는 수많은 오해와 착각이 바로 이 두번째 경우가 아닐까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상대방을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자신이 사랑한건 자기 자신인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나 자신도 괴로울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상처를 주기 쉽다. 실재를 잘못 인식하여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는 경우이다.
 
따라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실제의 세계와 내가 인식하는 세계 간에 차이가 있을 때 우리는 괴로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올바른 인식, 즉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곧 석가모니이며, 이러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도들의 목적이다.


2. 우리는 실재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가?

2.1. 철학자 - 실재의 올바른 인식은 가능하지 않다

농부가 실재하는 법칙을 올바르게 인식하던 그렇지 않던 그 법칙은 항상 존재하고 그대로 흘러간다는 스님의 말씀은, 주체가 인식하던 인식하지 않던 세상은 존재한다는 철학적 접근과 비슷하다. "실재가 존재하는가, 하지 않는가"는 철학의 큰 주제이다. 내가 경험하는 세상이 실제로는 우리 경험과 다른 세상이라면 이 얼마나 황당한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그래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상이 정말 있는 그대로의 세상인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많은 철학자들이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우리의 감각 정보일 뿐이라고 주장했었다. 내 앞에 놓여있는 탁자는 실재하는 탁자가 아니라 나의 감각 기관으로 들어온 데이타일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진정한 탁자를 볼 수 없다. 그저 탁자의 그림자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Russell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진정한 탁자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sense-data를 통해 실재하는 탁자의 일부분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탁자의 진정한 모습이 있기나 한걸까?
세상은 우리의 sense-data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우리가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는 진정하고 실제적인 세계를 꼭 전제해야 하는걸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실재하는 세계는 "없다". 모든 건 우리의 감각정보일 뿐이다.'라고 급진적으로 주장한 사람들을 idealist라고 한다. 곧 우리가 감각 기관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사람들의 주장에 따라 예를 하나 들어보자.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 만약 그 어느 누구도 이 나무를 인식하고 있지 않다면 그 나무는 세상에 존재하하지 않으며, 누군가가 그 나무를 보거나 만질 때, 그때서야 나무는 존재하기 시작한다.

Russell은 이러한 idealist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든다.
만약 실제의 세계는 없고, 모든 것이 우리의 감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세상을 설명하기가 너무 복잡해진다고.
내가 고양이를 한 마리 기르고 있는데, 어느 날 고양이를 집에 두고 하루 종일 외출했다가 밤 늦게 들어와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나는 아침에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집을 나갈 것이다. 집에는 고양이뿐, 다른 누구도 없다. 나는 하루 종일 밖에 있다가 밤 늦게 들어왔다. 고양이는 나를 보자 마자 밥을 달라고 재촉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제 이 상황을 idealist의 주장대로 해석해 보자. 앞서 이야기했듯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고양이를 인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고양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아침에 밥을 주고 집 밖으로 나가면 아무도 고양이를 인식할 수 없으므로 고양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밤에 돌아와서 다시 고양이를 인식했을 때부터 고양이는 다시 존재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고양이의 배고픔이다. 내가 집에 없는 동안 고양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고양이는 배고플 새가 없었을 것이다. 고양이의 입장에서 보면 아침에 자신은 밥을 먹었고, 주인이 나가자 세상에 없었다가(밥을 소화시키고 에너지를 쓸 시간이 없다) 주인이 돌아오자 다시 뿅 나타나는 거다. 즉 고양이는 주인이 밤에 돌아왔을 때 계속 배가 불러 있는 상태여야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고양이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던 그렇지 않던 때가 되면 배가 고프다. 이렇게 간단한 현상을 idealist의 관점에서 설명하려면 상당히 복잡하고 어렵게 된다. 설명력이 부족하므로 좋은 이론이 아닌 것이다.

http://i.kdaq.empas.com/imgs/qrsi.tsp/5969811/10611114/0/1/A/%EA%B3%A0%EC%96%91%EC%9D%B4.JPG

요렇게 깜찍한 놈이 보지 않을 땐 없어진다면 너무 아쉽잖아. =.=



2.2. 불교도 - 실재의 올바른 인식은 가능하다


Russell의 반박으로 idealist의 주장은 빛을 잃었다. 실재하는 세상은 누군가가 인식하던 하지 않던 항상 존재하며 나름대로 움직인다.  앞서 스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문제는 이 실재하는 세계, 그리고 이 세계가 돌아가는 법칙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느냐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재를 감각 기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것도 일부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철학의 논의는 여기에서 끝나는 듯 하다. 그러나 종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그 방법으로 불교에서는 실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깨달은 사람인 석가모니를 모델로 그의 수행 방법을 배우고, 그와 같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쉼없이 수행하기를 권한다.

철학의 결론대로, 우리는 감각 정보를 통해 실재를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실재를 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깨달은 사람들이 적지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긴 수행의 시간이다. 석가모니가 진짜 깨달았는지 안했는지 내가 증명할 방법이 없기에 이 부분은 미스테리이지만, 난 깨달았다고 믿기 땜시롱 나의 결론은 이러한 거지-. 이제 나에게 필요한건 수행.


Posted by Sunny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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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30 20:17

(이 글은 오래전 1998년도에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인간현상」(한길사)을 읽고서 쓴 글이다. 현재 기독교 안에서 논의되는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정보 제공과 참조 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올린 글임을 밝혀둔다. -정강길)

1. 들어가며

98년 8월 12일자 <뉴스위크>를 보면 '과학과 종교의 절묘한 조우'라는 타이틀의 기사가 나온 적 있다. 기사의 내용에 따르면 바야흐로 회의(懷疑)에서 출발하는 과학과 믿음에서 출발하는 종교가, 하나의 지평에서 만나게 되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과학과 종교가 서로 상대를 부인하는 적대관계였지만, 이제는 과학과 종교가 상호적으로 관계되면서 이전의 근대성에서 벗어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우리 가운데 불러일으켰다. 앞으로 과학자들은 종교인들과 더는 골치 아픈 싸움에 휘말리지 않아도 될 것이며, 종교인들은 자신의 신앙심과 과학적 사유의 충돌로 인해 혼란에 빠지는 일 또한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극히 과학적인 사실을 파면 파고들수록,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종교적인 섭리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점점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2. 과학과 종교의 대립과 갈등

근대 세계의 인식의 문을 연 데카르트는 인간의 '생각함'을 주체로 내세우면서 중세 신앙이 갖고 있던 사유의 벽을 깨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는 자연 과학의 발달을 촉발시키는 데에 그 철학적 근거를 세웠다. 그러나 주체와 객체를 이원론적으로 보는 인식의 이러한 흐름은 과학과 종교를 점차 분리시키면서 그 골을 계속 깊어만 가게 했다.

이때 등장한 세계관이 우리가 흔히 잘 아는 이신론적(理神論的) 세계관이다. '이신론'이란 신이 이 우주를 창조할 때 우주를 돌아가게 하는 이치를 창조하여, 신은 이 우주가 돌아가는 일에 손을 떼버렸다는 신관이다. 그래서 당시 갈릴레오는 이 우주를 가리켜 "수학의 언어로 쓰여진 바이블"이라고 하기까지 했다.

이신론은 근대 자연과학자들이 유신론자들의 눈치를 보며 궁여지책으로 짜낸 유물론을 향한 유아기적 항변이요 음모라고 할 수 있겠다. 17세기에 등장한 뉴턴 물리학은 과학적 유물론의 결정판이자 인간 이성의 위대성에 대한 절정을 이뤄놓았다. 뉴턴 물리학이란 그 옛날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데모크리토스 원자론의 세련된 예증에 다름 아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들만이 인정받는 이러한 분위기는 끝내 종교를 부정하는 무신론과 유물론을 본격적으로 등장시켰고, 과학과 종교의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대결로 치닫게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특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일수록 두드러지게 과학과 종교를 대립적으로 보면서 이를 경시하고, 더러 기독교 신자에 처해있는 과학전공자들 가운데는 신앙이라는 명목 하에 분명하게 일반화된 사실조차 조작한다. 과연 과학과 종교는 서로를 부정해야만 하는 입장일 수밖에 없는가?

3. 떼이야르가 말하는 우주의 진화

   

▲ 'Pierre Teilhard de Chardin'(1881~1955)

여기에 대해 단호히 "그렇지 않다"고 20세기 초에 일찌감치 해결책을 제시했던 자 중에 하나가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이라는 학자이다. 그의 실존적인 삶의 자리가 이미 프랑스의 종교신부이자 고고학자요, 지질학자며, 생물학자였기에 이 심각한 주제와 그는 필연적으로 부닥치게 되어 있었다.

그는 물질을 얘기하는 과학의 비물질성을, 또는 종교에서 말하는 정신에너지(얼)의 물리적·생물학적 작용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며, 다가올 21세기에도 지속적으로 유효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그가 기술하는 우주는 정태적이고 불변적인 정지한 우주가 아니라 진화의 과정상에 있는 역동적인 우주이다. 특히 그의 대표적 저서인 「인간현상」(1939)은 이를 잘 얘기하고 있다.

태초에 우주가 발생하고 태양의 파편으로부터 나와 형성된 '청년지구'는 무기물과 유기물을 구성하면서 생명 현상을 출현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떼이야르는 무기물계와 생명계라는 두 세계는 본래부터 한 몸이었다고 한다. 단세포 단계에서는 동물과 식물의 구분이 불분명하듯이, 그것은 낮은 단계에서는 모호하고도 희미한 존재로 있었을 뿐이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떼이야르는 이것을 '이른 생명'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사물의 바깥만을 살피는 자연 과학으로 볼 때에 그것이 뚜렷한 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적어도 세포가 출현했을 때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이른 생명이 '생명'을 낳았다고 보는 것이다. 생명은 적극적으로 팽창하여 오늘날 우리가 아는 계통수의 생물을 번식시키고, 영장류의 진화과정을 거쳐서 결국은 인간현상을 태동시킨다.

사람은 조용히 등장했다. 사람의 등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곧 ‘생각’의 등장을 의미한다. 사람은 자신을 대상으로 놓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헤아릴 줄 아는 '반성'의 능력을 갖고 있다. 여기서부터 진화의 흐름은 이제 정신의 적극적인 진화에 돌입했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얼누리'(=정신계)의 형성이다. 사람 이전에 얼은 있었어도 얼누리는 없었다. 사람의 등장과 더불어 이제 본격적인 '정신의 진화'에 돌입한 것이다.

사람의 등장은 곧 정신사의 등장을 의미했다. 얼의 본격적인 진화는 이러한 얼을 하나로 수렴하는 양태로 나타난다. 즉 저마다의 무수한 생각의 알갱이들이 하나의 거대한 생각 덩어리로 합일되는 것이다. 조화로운 집단의식, 그것은 곧 '초의식'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또한 사람이 모여서 '큰 사람'이 되는 차원을 의미한다. 세계의 미래는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라는 진화의 궁극점에 이르러 '큰 사람'의 모습을 띤다는 것이다. '큰 사람'은 개체의 특성을 죽이는 전체주의적인 집단의식의 발현이 아니다. 그것은 개체의 특성을 살리면서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커다란 자율적인 중심을 얘기한다. ‘생명’이 낳게 되는 ‘다음 생명’은 바로 이와 관련한다는 것이다.

4. 사랑, 존재의 진화를 성숙케 하는 창조적 에너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놀랍게도 떼이야르는 '사랑'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만 사랑하지 않는다. 포유류에게도 모성애는 있으며, 하찮은 미생물에게도 사랑은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심지어 사랑은 물질의 미세한 분자에게도 있는 것이란다. 단지 그것이 낮은 단계로 갈수록 희미하거나 모호하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사랑이라는 것이 사람에게만 있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사랑이란 다름 아닌 나와 타자가 조화롭게 하나가 되려는 욕구다. 일반적으로 과학에서 말하는 끌어당기는 힘, 곧 '중력'이란 사물의 바깥에서 본 현상만을 얘기하며, 이에 상응하는 사물의 안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 사랑함으로서 결국은 '큰 사람'이 될 수 있다. 중력은 사랑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 에너지야말로 생명의 진화를 가능케 하는 창조적 힘인 것이다.

그렇기에 떼이야르가 보는 개체의 생명은 개체의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명'으로 이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는 그 자신의 불완전함을 사랑으로 극복하여 우주적 그리스도를 형성하는 것이다. 떼이야르가 생각하는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다.

나의 참다운 모습을 살리면서 전체와 조화롭게 공존하는 그러한 정신의 합일점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적 자아와 완벽하게 합일되는 차원이다. 이것은 나와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가 됨을 의미하는 지평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운데서 사랑으로 교통하는 차원인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 세계는 새 하늘 새 땅이 전혀 새로운 세계로 태동될 것이며, 우리 자신도 지금과는 다른 존재로 화하여 있을 것이다. 마치 분자가 결합하여 개체인 분자 그 자신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세포하나를 출현시켰듯이 말이다.

5. 인류의 치명적 독인 낙관주의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진화를 얘기하는 떼이야르의 사상이 한편으로 지나친 '낙관주의'에 기울어 있지 않나 생각할 수 있겠다. 분명 인간의 비극적 가능성들을 염두에 두지 않는 낙관주의는 인류의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떼이야르는 이르기를, 오메가 포인트의 성취는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가 작동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거부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배제해선 안 된다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오메가 포인트의 성취는 존재의 노력여하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분명히 '자율적인 중심점'이기 때문에, 존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관계적 지평에서 연결되어 있는 인류 전체를 파멸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류의 미래는 나 자신의 책임성과 항상 연관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나의 삶에 있어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곧 전체 인류의 미래와 진화에 관계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있는 거대한 이 우주적 진화에는 존재의 책임성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고 하겠다.

6. 떼이야르 사상의 학문적 평가

이러한 떼이야르의 사상은 진화론적인 과학 사상을 얘기하면서도 그것은 신학과 철학의 파트에까지 닿아있다. 사실 떼이야르의 사후에도 한동안 그의 사상은 학문적 주소를 찾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떼이야르의 진화론적 사상은 전문적인 과학자의 눈으로 볼 때 과학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신비적이거나 사변적으로 보이고, 그렇다고 종교인이나 신학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신학 사상이라기보다 불경스런 생물학인 진화론에 치중한 것 같으며, 철학자의 눈으로 볼 때도 철학으로 인정하자니 철학사에 이같이 생물학과 지질학과 기독론이 짬뽕된 특출난 사상이 일찍이 없었기 때문에, 도무지 그의 학문에 대해 번지수를 매기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만큼 떼이야르 사상은 당시로선 독특하면서도 전체 학문을 아우르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의 종교적 신앙은 과학적 사유를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과학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러한 합리적 사유의 끝에는 언제나 비합리적인 궁극성과 맞닿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떼이야르의 사상을 과정(過程)사상에 포함시켜 평가하기도 한다. 떼이야르는 우선 기본적으로 이 우주를 유기체적 사태로 본다는 사실이다. 떼이야르가 보는 이 우주는 하나이기 때문에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현상이든 그 뿌리는 우주 전체와 관련이 있다고 얘기한다. 이 우주의 관계망에서 그 어느 것도 따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실체란 있을 수 없다.

이 우주에 단 한 번의 핵과 전자가 출현하여 수십억 년을 거쳐 서서히 진화해온 물질은 점점 조직화·복잡화의 단계를 거치며, 이 지구상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켰다. 이것은 물질의 진화 속에 '얼'(=의식)이라는 것이 항상 내재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떼이야르는 사물의 바깥은 물질의 복잡화로 나타나며, 그 속에서 발현되는 사물의 안은 '정신'으로 본 것이다.

자연과학은 그때까지도 사물의 바깥만 살필 줄 알았지, 사물의 안은 들여다 볼 생각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침데기'처럼 내색은 하지 않지만, 분명 물질에는 안이 있다는 게 그 자신에게는 굽힐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모든 존재 사물의 안과 밖을 말하는 떼이야르는 항상 이 두 가지 측면을 갖고서 총체적으로 이 우주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7. 성서문자주의와 창조론자들의 착각

오늘날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창조론자들은 물질의 진화라는 패러다임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물질의 진화는 조직화·복잡화의 법칙과 관련하는데, 이것은 소위 말하는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되는 발상이라는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은 에너지의 질적 쇠퇴를 말한 법칙인데, 이것은 운동하고 있는 물체에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그 물체는 점점 그 운동성을 상실해 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달리는 자동차가 언제나 달릴 수만은 없으며, 계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는 한 그 자동차는 정지하고 말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은 곧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과 상응하는 개념이다. 즉 물질은 자연적인 반응으로 인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무질서해지는 쪽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열역학 제2법칙으로 인해 떼이야르의 진화론적 패러다임은 치명적인 오류를 안고 있는 사유체계가 되는가?

천만에! 20세기 첨단 과학이 밝혀낸 지성의 빛은 생명계와 같은 개방계에 있어서는 오히려 엔트로피가 감소하고 열역학 제2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노벨과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일리아 프리고진(Ilya Prigogine)의 명저인「혼돈으로부터의 질서」(1984)에도 상세하게 잘 나타나 있다.

떼이야르는 물질의 진화가 엔트로피 법칙에 맞설 수 있는 이유는 사물의 '안'인 얼의 존재 때문이라고 말한다. 진화의 메커니즘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하며, 그 얼은 사물 '밖'의 조직화·복잡화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오늘날 첨단의 과학인 양자 물리학의 세계에서도 물질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과학자들은 그것이 물질인지 비물질인지조차 헷갈린다고 고백한다. 놀랍게도 뉴턴 패러다임이 붕괴된 이후의 현대 물리과학은 오히려 물질에서 정신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창조론자들이 일면 똑똑해 보이는 소리를 한 것 같지만, 오히려 이들의 주장이야말로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사상임을 알아야 한다. 알다시피 창조론은 성서의 창세기에 나타난 문자 그대로를 역사적 사실로 주장하여 하나님이 뚝딱 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에 나타난 구절들을 우리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으로 이해해야지, 그것을 실제 사실로 보는 것은 참으로 가소롭고도 무지한 유아기적 발상에 불과하다.

설령 하나님이 뚝딱 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치자. 그렇게 쉽게 만들 거였으면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히려 수백억 년 동안에 수십억 번의 진화를 거듭하여 겨우 인간의 생명 하나가 태동하였다는 사실 쪽에 더 진중한 무게가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고귀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이리라. 놀랍게도 '나'라는 개체의 생명은 지금까지의 모든 우주 생명의 기운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존재에 생명의 존엄성과 그 자신의 섭리를 불어넣으시고 계신다는 놀라운 은총이 발견된다고 보는 것이다.

요컨대 떼이야르의 주장은 물질의 우연적인 진화는 바로 필연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결부된 것이라고 보았다. 성서문자주의자들이나 창조론자들이 현대과학의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마냥 종교와 맞지 않는다고 보거나 신을 부정한다고만 생각해버리는, 그 생각과 신앙의 짧음에서 기인한다. 사실상 이점은 근본적으로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치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8. 모든 만물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떼이야르의 신관은 범신론인가? 아니다! 범신론적이지만 범신론은 아니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그것은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이라고 표현해야 옳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제자인 찰스 하트숀(Charles Hartshorne)의 용어이기도 한데, 하나님은 모든 만물에 내재해 있으면서 동시에 모든 만물을 초월해 계신 분이라는 것이다. 성서에서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며,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신다"는 에베소서 4장 6절의 말씀은 범재신론의 가장 정확한 표현이기도 하다.

현실 세계의 특성에 대한 사려와 함께 시작하는 어떠한 증명도 이 세계의 현실성 이상으로 올라갈 수는 없으며, 그것은 다만 경험되는 이 세계 안에서 드러난 모든 요인만을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지극히 과학적으로만 발견할 수 있는 신의 양태는 내재적 신이지 전적인 초월적 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떼이야르는 세계에 내재하는 '얼'이라는 것의 궁극적 시원이 당시 과학에서는 발견되진 않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성육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분명 하나님은 육으로 오셨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돌들이 소리쳤을 게다. 그리고서는 우리 모든 인간에게 하나의 커다란 '자율적인 중심점'을 제공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신과 인간의 화해와 통합의 장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통한 물질에 내재된 '얼의 신적 완성'을 뜻한다.

9. 떼이야르 사상의 현대적 의미

떼이야르의 사상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그의 사상은 서양의 사상사에서 갑론을박하며 싸워왔던 정신이냐 물질이냐의 논쟁에도,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는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도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사변적인 관념론이나 물질을 먼저 내세우는 유물론이나 다들 대답의 반만 갖고 있는 셈이기에 둘 다 틀렸다고 봐야 한다. 이에 대해 떼이야르는 정신과 물질은 사물의 안과 밖의 모습일 뿐이며, 물질의 진화는 곧 궁극적으로 신의 창조사역이라고 못 박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의 많은 과학자들은 과학을 넘는 종교로 귀의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명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 환경문제를 중요시하는 생태학에도 여러 가지 사상적 근거를 안겨준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그냥 창조된 것이 아니라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설치고 비바람이 부는 인고의 세월을 거쳐서 잉태되는 것이기에, 그 생명 하나하나가 모두 다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저 들녘의 이름 모를 꽃 하나에도 이 우주의 숨결과 생명의 날줄 씨줄들이 얽혀있다. 역으로, 흘러가는 저 강물이 오염되면 우리 자신도 오염된다는 사실도 인지시켜 준다. 왜냐하면 나와 이 우주는 하나로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세계의 문제는 우리 몸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가이아'GAIA라는 총체적인 이 지구 환경은 살아있는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이며, 그것은 우리가 얘기하는 '얼'이라는 것을 실제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구가 숨을 쉰다"는 표현이 마냥 지구를 단순히 의인화시킨 통속적 문장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지구는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부터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귀가 있어도 대지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에겐 화 있으리라!

무엇보다 떼이야르의 사상은 우리에게 고귀한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사랑'이라는 것이 연가풍의 시(詩)나 멜로물 영화에나 붙는 딱지가 아니라, 과학의 세계에서도 정말로 실재하는 창조적 에너지라는 점이다. 그것은 물질의 진화를 가능케 하는 세계 안에서 신의 기능이다.

존재는 서로 사랑함으로 인해서 존재 자신의 불완전성을 극복할 수 있다. 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명령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하는 것만이 인류의 살길이요 거듭나는 길이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인류는 '진보'한다기보다 인류는 그저 '생존'할 뿐이다. 즉 인류의 진화는 인류의 생존과 바로 직결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자신의 생존에 대한 욕구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살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는.

특히 현재의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서로가 서로를 돕지 않으면 결국 우리 자신도 도태되고 만다는 현실을 아주 잘 말해준다. 내가 없으면 타자도 없겠지만 타자도 없으면 '나'라는 존재도 무의미하다. 사랑은 그렇게 나와 타자를 이어주며, 서로를 완성시킨다.

10. 나오며 : 사랑으로

   

▲ 'Pierre Teilhard de Chardin'(1881~1955) 삽화

나는 확신한다.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소외된 이웃의 아픔을 느낄 수 있으며,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그들을 위해 투쟁할 수 있다.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분단의 아픔과 통일을 외칠 수 있으며,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인류의 평화를 위해 봉사할 수 있다.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한 톨의 밥알도 남기지 않으며,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한 자락 바람과 한 줌의 햇빛으로도 아름다운 시를 읊을 수 있다. 그리고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이 우주 세계에 충만한 신의 은총에 전율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사랑만이….

(이외 '진화냐 창조냐'의 문제는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출판하는 월간 <기독교사상>1997년 2월호 "특집-창조신앙의 바른 이해를 위하여"에 실려 있는 여러 학자들의 글을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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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ny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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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30 19:26





 
<하나님 중심/계시/신비>를 빙자한 사유의 폭력
 
바르트식의 신학적 사유 패턴과 러셀 패러독스

 
 
흔히 말하듯 보수 기독교인 두고 종종 “묻지마 신앙인”이라고도 말한다. 왜냐하면 그 어떤 교리적 전제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져선 안되고 결국은 무조건 믿어야만 신앙이 성립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결코 건들면 안되고 비판이 불허되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여전히 전통 교리가 깨어지면 기독교 자체가 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즐비한 현실이다.

이때 이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신비와 계시를 매우 강조하면서 이에 대해서 더 이상 캐내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언뜻 보기에는 매우 하나님을 매우 높이고 있는 신실한 신앙인이 아닌가 라고 생각될 정도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을 하나님 중심으로 보겠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하나님 중심 혹은 하나님의 신비와 계시 중심이라는 이런 주장들을 내세우는 사람들의 신학적 사유가 저지르는 또 다른 폭력의 위험성도 감지할 필요가 있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놓는다지만 실상 그 자리는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의 언명과 행위가 중심으로서 놓여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신학적 사유 패턴의 한계는 흔히 루터나 칼빈 등등 독일 및 유럽 계통의 신학들을 추구하는 사람들, 현대에선 더 뚜렷하게는 바르트 신학 추종자들에게서도 종종 보여지는 사유의 패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러한지를 잘 살펴보자.
 
 
▲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칼 바르트는 나름대로 그 시대에선 최선을 다한 신학자였다고 본다.
정작 멍청한 것은 루터-칼뱅-기독교 전통 운운하면서 여전히 바르트의 신학을 끌어쓰고 있는 그 추종자들인 것이다.
이들은 사실상 바르트식 신학에 깔려 있는 그 사고 패턴의 폐해와 한계를 전혀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은 흔히 잘 알려져 있듯이 그는 <계시 중심>의 신학자다. 그가 보는 성서 이해도 성서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책이 아니라 인간에게 건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는 스스로 드러낼 뿐이지 그 어떤 인간의 것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바르트의 신학적 사유에는 초월자인 하나님의 계시를 절대화함으로서 역으로 시공간의 모든 현실적인 것들은 상대화시켜버리겠다는 신학적 전략이 짜여져 있는 것이다.
 
당시 바르트는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인간 문명의 전적인 타락과 위기를 경험하였었고, 시대의 위기를 부르짖으며 하나님만을 신뢰하게 되는 신앙적 토대를 가지게 되었다. 바로 그렇기에 히틀러의 독재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저항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모든 것들은 상대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물론 그 시대 바르트의 삶은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는지 몰라도 그 같은 바르트식의 사유 방식은 시대적 상황과 여건에 따라 좋을 수도 있지만 매우 나쁜 사유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같은 사유의 패턴을 꼼꼼히 살펴볼 경우, 그러한 상대화의 범주 속에 사실상 히틀러 뿐만 아니라 바르트 그 자신도 예외일 수 없기에 바르트 신학 역시 상대화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바르트 자신의 신학적 언명들만큼은 모든 상대화의 예외로 치부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가 철저히 바르트식으로 따른다고 할 경우에는 실상 그 자신도 상대화되어야만 하는 모순적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런 사유 방식들은 흔히 <궁극적으로 불가해한 것>을 중심으로 놓고서 실상 자신은 판단할 것은 다 하고 있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모순의 형극을 낳는 꼴인 것이다. 이를 테면 용왕을 믿는 <용왕교>의 그 어떤 교주가 “우리는 용왕님의 말씀만 받들어 모셔야 한다”고 말했을 때, 용왕님을 모시고 있는 그 교주의 말은 진실로 용왕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교주 자신의 말인가?

논리학에서 이 같은 모순의 발견이 바로 수리논리학자이자 무신론자인 버트란트 러셀(B. Russell)에 의해 발견이 되었고, 그래서 이를 <러셀 패러독스>Russell's paradox라 고 부른다. 혹은 경우에 따라 <수행 패러독스>라고도 불린다. 왜냐하면 자기 이론대로 충실히 수행을 하게 될 경우 자기 모순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러셀의 이 유명한 발견은 프레게의 논리체계와 칸토어의 소박한 집합론이 치명적 모순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 예이기도 하다.

논리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흔히 잘 알려져 있는 기원전 6세 때 철학자이자 크레타 섬 사람이었던 에피메니데스가 외친 “모든 크레타 섬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문장으로 유명한 <거짓말쟁이 모순>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물론 모순에 대한 발견은 후세의 발견이며, 러셀 자신은 대중판 버전으로 '이발사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자기 자신을 그 어떤 집합의 구성원으로 하면서 그 자신이 그 집합에 대해 언급할 때는 반드시 모순에 직면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애초에 하나님의 계시와 신비 중심 어쩌구 하는 신학 얘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나는 지금 논리학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왜냐하면 나는 지금 바르트식 신학이 지닌 그 사유의 형식적 패턴이 낳고 있는 폐해와 한계를 그 치명적 문제로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렇기에 이는 비단 바르트 신학만의 문제도 아니다. 이외 비슷한 사고 패턴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앙인들을 비롯하여 (특히 종교 진영에서) 불가해한 영역을 빙자하여 자신의 입지를 중심화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문제인 것이다.

바르트식의 신학적 사유에는 하나님만이 절대로 숭상되면서 인간의 나머지 것들은 상대화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지만, 그렇게 얘기하는 그 언명 자체는 절대화되고 있는가? 상대화되고 있는가? 즉, 은근히 바르트 그 자신의 신학적 언명들은 절대화되고 있으며, 하나님 위치에 놓여 있는 자기 모순을 낳게 된다는 얘기다. 물론 그 자신은 자기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할 진 몰라도 말이다.

하나님만을 높이고 모든 것은 상대화하면서 은근히 그 같은 자신의 주장과 언명은 중심적인 위치 즉,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고 있는 이 같은 사유의 폭력성을 나는 지금 문제 삼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실상 꼼꼼하게 따져보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여전히 사람 중심으로 대체되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이 같은 사유가 바르트 당시엔 하나님 위치에 있던 독재자 히틀러마저 상대화해버리는 좋은 기능으로서 발현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바르트식의 신학적 사유 패턴 그 자체는 바로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이 저지르고 있는 횡포와 모순과도 매우 흡사하게 닮아 있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하나님 중심/계시/신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종종 부르짖는 그 <하나님 중심>이란 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하나님의 신비와 계시>라는 게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더욱 철저하게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고 본다. 혹자는 철저히 묻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시나 신비가 퇴색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얘기야말로 더욱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계시나 신비에 대해선 묻지 말고 스스로 드러내도록 그대로 두어라"고 한다면 결국 우리의 기독교 신앙도 <묻지마 신앙>이 되기 십상인 것이다.

또한 혹자는 철저히 묻는 것을 두고, 이를 ‘환원주의자’라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내가 보기엔 이들이야말로 <환원>과 <소통을 위한 설명적 해명>을 분명하게 혼동하고 있을 따름이다. 돈 큐빗(Don Cupitt)이 적나라하게 비판한대로 기독교인들은 그 자신들끼리만 통하는 비밀 용어들을 잘도 쓰고 있는 형국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자기들끼리만 통용되는 '계시'니 '성령'이니 어쩌구 저쩌구 하며 모임을 가질 뿐이다. 그런데 정작 “그것이 뭐냐?” 물으면 “묻지마! 그냥 체험해!” 라는 말한다. 아, 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가!

나는 그렇기에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성서비평을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그를 진보 신학자로 분류하거나 혹은 바르트가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를 온전히 극복했다고는 결코 보질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수행하고 있는 사유의 형식적 패턴 자체는 여전히 보수 근본주의자들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바르트식의 신학적 체계 역시 은연 중에라도 가부장적 사유 체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흥미롭게도 가부장적 폐해를 극복하겠다는 국내 여성신학자들 중에는 멋모르고 바르트 신학을 추종하는 이들도 꽤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바르트가 그의「교회교의학」에서 가부장적 질서를 주장한 것도 우연만은 아닌 것이다.
 
(* 참고로 바르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종관계는 구조적이며,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여자의 신앙적 응답은 자기의 합당한 위치를 지키고 남자의 선도를 따르는 데 있다고 얘기했을 뿐만 아니라, 여자가 진정으로 해방되기 위해서는 반항하지 말아야 하며, 그러한 여자의 반항은 하나님의 질서에 대해 모독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남성 신학자였다. 또한 바르트의 신관은 상호 관계적 소통의 신관이 아니라 절대 타자로서의 초월 신관이자 결국은 일방 관계로서의 신관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마초적 성격의 신관이라는 점도 첨언될 필요가 있겠다).

“하나님 중심주의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하나님 중심을 부르짖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온갖 난리들을 펴대지만 실상 알고 보면 결국은 그 자신의 입장을 중심으로 놓고 있을 따름이다” 즉, 알고 보면 하나님을 모신다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배제되고 있는 아이러니한 형국이라고 하겠다. 이는 평화의 이름으로 평화가 말살되고, 정의의 이름으로 오히려 정의가 더렵혀지는 역설적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님 중심/계시/신비를 줄창 강변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일수록 합리성을 중시하는 현대인들을 점점 설득해내기가 어려워지는 것도 알고 보면 지극히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 이면에는 바로 러셀 패러독스라는 논리적 모순을 해결해내지 못하는, 그 같은 사유 방식에 대한 필연적 한계가 은연 중에라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한계로 인해 보수 기독교인들은 합리적 설득 차원에선 제 풀에 지쳐 "신앙이 어떻게 합리적일 수 있느냐.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라는 불가지적 입장으로 처리해버리고, 그리고 나서 전도 대상자들에겐 "믿어라, 직접 체험해보면 안다"는 이런 식의 강요적 태도로만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끝 으로 그렇다면 나 자신의 입장 즉, 나의 이 같은 주장들은 또 어떻게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가 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당신도 그렇고 우리 자신들 모두 그 어떤 주장을 하더래도 결국 상대주의 입장에 처해 있을 수 밖에 없잖은가 라고 물을 수 있겠다. 그렇다! 인간의 그 어떤 주장도 그 출발에 있어선 절대화될 수 없다. 심지어 하나님 중심주의 주장 자체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인가? 인간은 결코 직접적으로 진리를 붙잡을 수 없다.
 
바로 그래서 나 자신은 <오류>와 <모순> 및 <비극>의 발견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가 진리로 나아가는 길은 그나마 <오류>와 <비극>을 통해 조금씩 나아갈 수 있을 따름이다. 당연히 나 자신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오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만 있다면야 얼마든지 나의 이런 얘기들에 대해 그 어떤 얘기들도 기꺼이 환영하는 바이다. 참고로 나 자신이 추구하는 진리 추구 방법에 대해서는 "내가 믿고 있는 것은 과연 진리인가" http://freeview.org/bbs/tb.php/b001/108 라는 글을 참조 바란다.
 
자신의 그 어떤 주장들도 예외 없이 결국 모든 주장들, 모든 이론들의 경합은 언어상에 있어서는 소통 차원에서의 설명력 확보 유무에 달려 있다는 점을 우리는 결코 잊어선 안된다. 설령 그것이 <하나님 중심/계시/신비> 어쩌구 강변하는 종교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관련글] 우리가 흔히 쓰는 신앙적 언명들의 무기력함과 공허한 비생산성
http://freeview.org/bbs/tb.php/b001/114 참조


* 출처 : www.freeview.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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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ny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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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he edge 2009/03/31 08: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르트를 아시나요?

  2. the edge 2009/03/31 08: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르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나 관점이 그러할 수 밖에 없겠다는 안타까운 사실이, 그리고 그 이유가 당신의 글을 읽으며 자연스레 깨달아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계시 중심, 하나님 중심, 뭐 중심 등등의 표현이 말해주듯 당신의 바르트를 비롯한 신학 또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이해는 거의가 이차자료에 의존하고 있음을 저는 알 수 있습니다. Geoffrey Bromiley에 의하면 바르트 관련 이차자료들은 안읽느니만 못하다는데요. 코끼리 더듬는 시각장애자들의 '편견'과 같은 것들로 가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르트를 이해하려면, 아니 그 거대한 바다 앞에 서서 한번 바라보는 시도라도 하려면, 그의 로마서 주석과 함께 교회교의학을 영어로라도 직접 펴고 한페이지씩 넘겨가며 읽어보는 노고와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음을 말씀드립니다. 교회교의학 중 단 한권이라도 진지함으로 읽어보신다면, 위의 글과 같은 생각은 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가지 더, 그래도 이차자료로 어떤 지름길을 택하고 싶으시다면 제가 추천해 드리지요. Eberhard Jungel, Thomas Torrance, Bruce McCormack, George Hunsinger... 이 네 분에 한해서 읽으시지요. 저는 McCormack과 Jungel을 선호합니다만...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매료'당한 정신입니다. 말씀에 '빠지는' '사건'이 있으셔야 바르트에 관해 진지해질 수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Pauline formula가 이해되길 바랍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바르트, 그가 왜 신학을 '기쁨에 찬 학문'이라 고백했는지 조금은 느껴지실 겁니다.

    • BlogIcon Sunny June 2009/04/02 17:38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선 이 글은 제가 쓴 글이 아니라 '세기연'이라는 기독교 단체의 글을 퍼온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신 분의 바르트에 대한 이해도가 어느 정도인지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하지만 제가 보기로는 글쓴 분은 바르트에 대한 디테일한 정보보다는 그 사유 패턴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신 것 같습니다.

      소위 '신만이 아신다' 또는 '체험한 후에야만 알 수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자신의 그러한 주장의 모순을 깨닫지 못하는 데에 의문을 표시하기 위해 바르트를 예로 드신 것이지요.

      저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의 인간적인 관계, 또는 자주 회자되는 '체험' 그리고 the edge님이 말씀하신 '말씀에 빠지는 사건'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알지 못하는 이유를 다만 '말씀에 빠지는 사건 / 하나님 체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면 저로서는 참으로 난감합니다.

      전 이러한 체험이나 사건이 이성을 초월한 경험임에는 동감하지만, 이성으로 전혀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성을 마비시킬 때 맹목적인 신앙으로 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신앙은 이성의 의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올바른 답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성적인 의문 따윈 덮어두고 그저 '믿으면 알게된다!'고 한다면, 이러한 사람들의 주장은 '인간은 알 수 없는 스스로 드러날 신의 계시'에 합당한걸까요? 신의 뜻을 알 수 없다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주장에 대해선 그렇게 확고할 수 있는걸까요? 위의 글을 쓴 분은 바로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고 계시다고 생각이 듭니다.

      the edge님께선 바르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건'을 체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 사건을 체험하고 바르트의 저작을 읽는다고 할지라도, 위에서 말한 모순이 풀리지는 않을 듯 싶습니다. 오히려 더욱 강화될 뿐이지요. 이러한 점에서 저는 위의 글을 쓰신 분이 매우 날카롭에 모순을 간파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3. the edge 2009/04/03 07: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학의 근거와 출발점이 되는 계시(revelation)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이자 하나님 자신을 말하는데요. 바르트 신학에서는 그 계시 자체가 하나의 사건(event)입니다. 이 event는 분명 ‘사건적’이면서 ‘사건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건’으로 번역되는 순간 우리말의 ‘체험’과 혼용되는 사례가 허다합니다.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이성과 반대개념으로서의 체험을 우리는 떠올리고, 또한 체험을 전제로 하는 그런 신학이라면 그야말로 가장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인 ‘사유패턴’이라고 비판받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바르트 또한 비판받아야 마땅하다는 논리… 이해합니다.
    계시와 이성의 관계에 있어서, 계시가 먼저인 것은 분명하지만 “Theology means rational wrestling with mystery” (CD I/1, 368, rev.)라고 말한 바르트에게 있어서는 신학이야말로 가장 이성적 사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체험과 연결된 종교적 감정에 모든 것을 걸었던, 슐라이에르마허를 대표로 한 자유주의와 그 배경을 이루는 경건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revolt로서 객관적으로 계시된 말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the Godness of God)으로 그 시대의 신학이 돌아갈 것을 그의 ‘이성적(신학적)’ 사유를 통해 부르짖었던 것이죠.
    그러기에, event로서의 revelation에 신학의 초점을 맞추었던 바르트의 신학적 frame은 그 배경과 결과에 있어서 인식론과 가장 깊게 결부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계시된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knowledge of God’이라는 인식론적 주제가 그 신학의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최근의 주요 바르트 학자들 사이에서 바르트가 받은 가장 큰 철학적 영향은 다름아닌 칸트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 같구요. 그의 칸트 사상과의 관계는 역사적 상황과 바르트의 intellectual biography들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말씀에 빠지는 사건이 있으셔야…’ 라는 표현이 지적하신대로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저도 인정합니다. 제 표현의 미숙함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 일컬어지는 바르트 신학의 측면과 사건, event로서의 계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게… 제 마음이 조금 급했습니다.
    무조건 믿어야 알 수 있다. 믿어야 된다… 라는 표현들… 저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믿음, 체험… 다 기독교에 있는 개념들이구요.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오용되고 오해될 때가 많은 게 사실입니다. 특히, 체험이라는 말로 진리에 대하여 무언가 ‘소유’의 개념으로 변질된 현대 기독교 신앙은 지극히 물량적인 방향으로 치달을 위험이 큽니다. 여기에 바르트 신학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계시의 event는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epistemological issue로서의 ‘계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key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시에 근거한 기독교 신학과 신앙은 subject와 object의 ‘관계’입니다. 소유할 수 있는, 내 것이 될 수 있는, ‘체험’이 아닙니다. 어떠한 ‘관계’가 형성이 되고, 그 관계 사이의 앎, 인식, 지식의 과정을 거쳐, 그 결과로서 나중에, 그 후에… 내 삶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 체험이라고 지칭되는 어떤 것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신학을 과학이라고 했고, 모든 과학적 영역에서 꼭 필요한 진리의 ‘객관성’의 근거를 신학의 영역에서 인식론적으로 진술해냄으로써 신학의 새로운 차원과 시대를 열었다고 보여집니다. 바르트의 이러한 과업은 T.F. Torrance의 Scientific Theology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고도 생각됩니다. 토런스는 바르트의 가장 중요한 제자 중의 한명이며, 뛰어난 신학자이자 가장 주목할 만한 영어권 바르트 학자입니다. 바르트를 통해 제가 만나게 된 그와 같은 ‘이성적 사유’의 세계는 Dharma님의 ‘이성적 의문’들에도 새로운 답변을 줄 것입니다. 때로는 그런 답변들이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패턴’으로 오기도 한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어떠신지요…?!

    • BlogIcon Sunny June 2009/04/05 17: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시 찾아오셨네요. 이렇게 the edge님과 대화하게 되어 기쁩니다. :)

      올려주신 글은 잘 읽어보았습니다. 아마도 the edge님께서는 신학을 공부하시는 분이신 듯합니다. 사실 저는 신학에 관심이 있지만 혼자 이런 저런 책을 끄적여보는 정도라 the edge님께 여러가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올려주신 글을 읽으면서 약간 혼란스러운 점이 있었습니다. subject와 object의 관계로 이야기 될 수 있는 계시를 바탕으로 하는 바르트의 신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성적, 객관적, 과학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인식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것인지요? 아니면 바르트는 또 다른 과학적 방식으로 자신의 신학을 설명하고 있는것인지요?

      사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신이라는 존재를 증명해 낼 수 있는 방법이 없기에 신을 인식하고 그와 관계를 가지는 것 또한 참인지 거짓인지 알 길이 없을 듯 합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했다고 주장하더라도 실제로 그것이 신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런지요. 증명이 불가능하므로 이러한 사건이 '객관적인 진리'로 굳혀지기는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므로 신적인 사건이다, 아니다를 판단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신념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한가지, 제가 the edge님의 의견을 듣고 싶은 부분은 '러셀 패러독스'에 관련한 문제입니다. 바르트는 계시를 중시하고 그 계시만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에서 자기 모순에 직면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알고 계신다는 진리를 바르트 또한 붙잡을 수 없을 터인데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하나님이 주신 계시인 것처럼 절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포스팅한 글의 핵심이 바로 이 부분인 것 같은데요, the edge님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궁금합니다.

  4. the edge 2009/04/05 22: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려운 질문들을 많이 주셨네요.
    제가 다 대답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생각나는 것 부터 조금씩 말씀드려보죠...
    제 생각을 나눈다는 마음입니다. 좀 봐주시면서 읽어주세요. 너무 sharp하신것 같은데...^^

    바르트를 깊이 연구하고 바르트 신학에 관한 큰 저서를 남긴 분 중에 카톨릭 신학자인 발타자르가 있습니다. 발타자르를 비롯, 큉 같은 카톨릭 신학자들이 개신교 진영보다 먼저 바르트에게 우호적으로 접근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사실, 바르트는 그의 교회교의학에서 크게 개신교자유주의신학과 카톨릭신학 이 둘을 가장 집중적으로 공격했었는데요. 발타자르, 큉 등은 바르트 신학에 귀기울였고, 심도있는 연구의 결과들을 남겼습니다. 그러한 발타자르는 일찌기 바르트를 'God-intoxicated man'이라고 이름붙였습니다. 통찰...! 사실, 신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그 무엇이겠지요...

    하나님에 대해 먼저 좀 생각해볼까요?

    바르트가 영향받은 분 중에 안셀름이 있습니다. 안셀름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자명한 논증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가 발견한 하나님 존재증명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보다 더 큰 존재가 생각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만일 이 하나님이 지성 안에만 존재하고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보다 더 큰 존재가 생각될 수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보다 더 큰 존재가 생각될 수 없는 존재"인 하나님은 지성 안에도 존재하고 실제로도 존재합니다. 안셀름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수 없을 만큼 참되게 존재하신다"고 말합니다.... 안셀름이 시도한 하나님의 존재론적 증명입니다.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분과 식사 약속이 있었는데, 좀 일찍 오셔서...
    오늘은 이만...

  5. the edge 2009/04/06 08: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계속해드립니다.^^

    하나님이란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수가 없을만큼의 '하나님되심(the Godness)'으로 '거기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서술하는 다른 모든 표현에 앞서 바르트는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God is God)'라고 그의 로마서주석에서 말합니다. 하나님 자신 이외에는 도무지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죠.

    바르트는 그의 신학을 여타 신학 프로그램처럼 신론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는 계시론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계시야말로 '하나님의 자기해석'(융엘)이며, 하나님의 존재(being)인 하나님 자신이자 하나님의 행동(action)인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계시론을 통하여 바르트는 "the being of God and the action of God are identical each other"함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being/action간의 충돌, 모순, 차이를 늘 경험하고 그러한 불일치와 부조화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being이 곧 action이고, action이 곧 being이며, 바로 '그러한' 분이 성서안에(within the Bible)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말씀/행동을 통해 그분 자신/존재를 드러내시고(계시), being을 사람들 앞에 나타내시기(계시)위해 action을 취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의 객관적 현실이자 가능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에 신앙과 신학의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의 객관적 현실을 인식하는 객관적 가능성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을 듣고 하나님 자신(God Himself)과 조우(encounter)하게 됩니다. 이와같은 계시 event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변증법적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그 자체가 그대로 한 인격 속에 나타났는데,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변증법적 존재'이십니다. "인간/하나님, 십자가/부활, 종/왕" 등의 변증법적 관계가 예수님 한 분 안에 성서를 통해 보여집니다. 우리는 신적인 어떤 '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다른 소유적 체험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관계'가 되시는 '인격' 예수님을 아는(인식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어찌 이러한 관계가 개인의 신념으로 가능하겠습니까? 누군가와 사랑하는 관계를 갖게 되었을 때, 그것은 절대로 신념과 같은 것하고는 상관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지요. 사랑은 증명도 아니구요. 또한 체험이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사랑은 관계입니다. 사랑은 다만 그를 아는 것입니다.

    바르트를 잘 읽어보면 '러셀 패러독스'와 그의 신학은 아무 관련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용어, 개념 정리가 잘 안된 분이 쓴 글을 보시고 괜한 고민을 하시는 것 같아서요.
    '계시만을 따라야 한다''오직 하나님만 알고 계신다'... 이런 제게는 생소한 표현들에 의거해서 인간(바르트)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존재다.........? it doesn't make sense!
    그리고,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절대화한 적이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이야기 하나 들려드리죠.
    어느 비오는 날 밤, 바르트의 집에 젊은 신학생이 찾아 왔다고 합니다. 문을 열고 어서 들어오라는 바르트에게 고뇌에 찬 신학생이 말했답니다. "근데 사실... 저는 바르티안(Barthian: 바르트주의자)이 아닙니다..."
    그러자, 바르트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지요. "걱정말고 어서 들어오게나. 나도 바르티안이 아니니까...!"

    바르트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 학자 중 바르트가 살아있을 때, 바르트에게 직접 바젤대학에서 지도를 받고 학위를 받으신 분이 딱 한분 있는데, 고 윤성범 목사님이십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스위스를 떠나는 윤 목사님에게 바르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아시아 사람이니, 아시아 신학을 이제부터 연구하세요. 유럽인들의 신학은 유럽인들에게나 맞을테니까...!"

    바르트는 제가 아는 한 (저는 꽤 다양한 신학들을 훑어보았습니다), 모든 신학적 지성들 중 가장 '자유롭고''개방적'인 분입니다.
    그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모차르트의 음악들처럼...!

    • BlogIcon Sunny June 2009/04/08 14: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바쁘신데도 의견 나눠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지인과의 식사는 잘 하셨는지요?

      the edge님의 글을 보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부드러운 답변을;;;; 드리고자 했는데 궁금증을 억누르기 힘들어 또 본의 아니게 여러가지 질문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솔직히 바르트가 영향을 받았다는 안셀름의 신의 존재론적 증명에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안셀름은 증명의 전제로 '하니님은 보다 더 큰 존재가 생각될 수 없는 존재'라는 명제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신의 존재를 전제에서 이미 상정해 놓고, 그 논의의 결과로 '신은 존재한다'라고 한다면 이는 순환 논리의 오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러한 논리를 토대로 그 위에서 신학을 전개한다면 그 논의 또한 빈약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the edge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얼마전,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과정신학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들었습니다. 제가 제대로 공부를 해보지 않고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는 것이 좀 우습지만, 화이트헤드 철학을 꽤 공부하신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니 얼토당토하지 않은 내용은 아닌 것 같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화이트헤드는 처음 철학을 시작할 때 신의 존재를 상정하고 논의를 펼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논의를 해 나감에 따라, 어느 시점에서 도저히 어떤 'X'라는 존재를 말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논의가 진행되지 않음을 깨닫고 'X'를 상정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X를 신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고요. 저에게는 안셀름의 신의 존재론적 증명보다는 화이트헤드의 증명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the edge님께서 올려주신 내용 중 예수 그리스도와 계시와의 관계를 상세히 설명해 주신 부분, 매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특히 예수가 변증법적 존재라는 표현이 와닿았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일종의 '다리'인 것으로 보이는데요, 제 이해가 맞는지요? 예수님 안에 계시(하나님)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는 말씀이신지요. 그렇다면 또 한가지의 의문이 생깁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가질 수는 없는건가요? 요한복음 14장 10절-11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the edge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변증법적 존재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인간, 종/왕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이 표현으로 보아 하나님과 인간은 종과 왕처럼 상반되는 개념, 또한 그 둘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만약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말씀은 어떻게 이원론적으로 해석이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오늘도 질문을 잔뜩 올린 듯 하네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습니다.

      아, 그리고 러셀 패러독스에 대한 문제에 대한 답변도 감사합니다. 바르트가 자신의 입장에 유연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잘 알았습니다. :)

  6. the edge 2009/04/14 1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러가지 일들이 겹쳐 좀 바빴는데요. 답이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안셀름의 신존재증명과 같은 방법은 칸트를 비롯 많은 이들에게 비판을 받았는데요. 칸트는 이러한 논증이 사유의 논리적 필연성(Logical necessity of thought)과 존재의 본체론적 필연성(Ontological necessity of existence)간의 혼동에 기인한 논증이라고 반박합니다. 또한 그의 지식론의 중심이 되는 소위 선험적 종합판단에 근거해 볼 때, "하나님은 존재한다(God is, or He exists)" 혹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다(God is omnipotent)" 등의 말은 주어와 술어라는 관계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요, "존재(is, exists)"라는 말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결코 술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바르트 또한 그런 표현은 쓰지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God is God)이기때문이지요. 결국, 칸트에게는 합리론적 이성의 방법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이 타당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칸트의 이러한 입장은, 전통적인 신의 논증방법을 부인한다는 면에서 볼 때, 한편으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식의 한계성을 설정함으로서 신앙의 학적 가능성을 부정하고, 따라서 신학을 부정적으로 보았다는 입장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자신이 기독교 신앙의 윤리주의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이론적 사유가 아닌 실천적 사유를 강조하게 되었다는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두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그의 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입은 후대의 신학자들이 윤리주의적 신학을 낳게 되었다는 지적을 볼 때, 그는 기독교에 대하여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신앙의 이론적 토대보다는, 윤리, 실천적 차원의 문제로 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르트의 교의학은 그래서, 교의의 후반부에 늘 윤리학적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교의와 윤리가 하나가 되어 그의 교회교의학을 이룬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삶과 연결되어 있으며, 교리적 내용은 윤리적 실천에 의해 확증되고, 윤리적 당위성은 교리적 토대위에서 그 균형을 가질 수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물론 바르트 신학이 윤리주의적이라고 단적으로 명명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한 이름은 그의 선배들인 슐라이에르마허, 리츨, 헤르만 등의 자유주의 진영에 보다 어울리는 것입니다. 안셀름의 바르트에의 영향은 "faith seeking understanding"으로서의 신학과 그 방법론에 있으며, 신존재증명 자체에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 면에 관해서, 그리고 전반적으로는 칸트의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화이트헤드 철학을 토대로 한 과정신학은 한 시대를 풍미했다고 할만큼 미대륙에서는 주목할만한 것이었는데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존재론에 대한 서구철학 전반의 흐름에 하나의 반정립으로 헤라클레이토스의 존재론에 기초하여 새롭게 이 시대에 발전시킨 중요한 철학이라고 여겨집니다.
    다만, 신학함에 있어서,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생각해보아야합니다. 바르트가 그의 스승들의 19세기 신학을 극복하고 자신의 신학을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낼 때의 가장 중요한 저서인 로마서주석 2판의 서문을 보면, 그의 신학적 변화와 발전을 가져온 주요 요소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Franz Overbeck, Plato, Kant, Kierkegaard, Dostoevsky 등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그들보다 앞에 맨먼저 바르트는 "further study of Paul"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Kierkegaard와 Dostoevsky를 말할 때에는 "increased attention to that which is to be gained for understanding the New Testament from Kierkegaard and Dostoevsky..."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바울서신을 중심으로 한, 성서(the Scripture itself)가 그의 신학을 신학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바르트 연구에 있어서 어떤 학자들은 바르트가 어느 특정 철학을 절대적으로 근거하지 않고, 토대로 삼지않고, 신학을 세웠기때문에 그와 같은 '반토대주의(non-foundationalism)'적 신학의 모델로서 가장 포스트모던적인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바르트 신학이 postmodern theology의 출발이라고 지칭하면서 말이죠. 이러한 주장이 옳다 그르다는 바르트 학자들간에 계속 논의되고 있습니다만, 철학에서의 칸트가 한 역할을 신학에서는 바르트가 한 것 같고, 그의 신학이 칸트철학의 큰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오래전에 저도 과정신학에 흥미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요. 어느날 교수님께 제가 "바르트도 칸트와 같은 대철학자의 영향을 받았고, 그와 마찬가지로 과정신학도 과정철학의 영향을 그렇게 받았다는 점에서 결국 같은 맥락이라고 보여지는데...?"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교수님은 한마디로 "우리는 신학이 어떤 철학의 영향을 받았든지간에, 계시로부터 출발을 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를 보아야 한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바르트는 계시신학입니다. 즉, 성서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귀기울입니다. 루터,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특징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과정신학은 성서보다 과정철학의 철학적 틀이 그 신학을 control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이점이 실제로 그 신학의 전체적인 모양새에 큰 차이를 가져옵니다. 신학도 결국 인간의 언어로 인간에 의해 쓰여진 글이며, 그 많은 글들이 모여 책을 이루는데... 결국 책읽기를 통해 신학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한사람의 독자로서 마치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 한사람을 만나고, 팬이되고, 고정 독자가 되는 것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바르트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르트 읽기'가 주는 기쁨때문입니다. 그의 글은 참으로 unique한 쾌감을 줍니다. 과정신학도 읽어보았는데... 개관을 살피고, 좀더 읽어보려고 하면 할수록 아무런 읽기의 기쁨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just boring... 그래서, 과정신학은 조금밖에 모르구요. 그건 제대로 아는 게 아니니까 많은 언급은 자제하고 싶습니다. 다만, 정통(orthodox)에서 벗어난 신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신학자들 중에는 바르트나 본회퍼같은 분들이 정통 라인에 잇닿아있는 신학적 거인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서 동시에 인간이십니다. 그리고, 고난받는 종으로 오셨고 동시에 영광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이러한 변증법적 관계가 그 한분, 한 인격 속에 내재되어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변증법적 존재이시기에, 예수님 외에는 그런 분이 없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다리'역할을 하십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3대교리, '성육신, 삼위일체, 속죄 (incarnation, Trinity, atonement)'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실, 기독교 신학에서는 "Christ is everything"...입니다. 예수님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계시되셨기에, 예수님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알수도 없고, 예수님 안에서만 온전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ledge of God)'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 가는 길은 없습니다 (요14:6).
    그리고, 인용하신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라는 구절은 다름아닌 삼위일체적 구조 속에서 이해되어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중요한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빌립의 말에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하시며 계속되는 설명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됨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됨'으로 인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 자신(계시)임을 가르치십니다. 삼위일체론은 가장 난해한 신학의 분야인데요... 삼위일체론의 최고의 요약이 이 한마디에 있을 것 같습니다. "One Being, Three Persons"...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한마디 더...
    요한복음 4: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이 말씀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매혹적인 영역이라고 믿어집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관계는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관계가 지향하는 모델인데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와 가지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그러한 관계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과 나와의 생명적 관계의 극치를 표현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바울에게서도 반복적으로 보여지는 중요한 개념이며, 요한에게서도 이렇게 발견되는 성서의 중심적 개념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서는 다름아닌, '하나님과 인간(우리)의 관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지요. 이 아름답고 놀라운 '관계'로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BlogIcon Sunny June 2009/04/16 16:36  댓글주소  수정/삭제

      the edge님의 답글 기다렸답니다. 자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더 이야기가 나아가기 전에 먼저 이야기하고픈 것이 몇 개 있습니다. the edge님과 제가 가장 큰 견해차를 보이고 있는 것이 1.신관 2.성서 인 듯 합니다.

      우선 신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 저는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해답을 찾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주신 답변 - 안셀름의 신의 존재론적 증명 또는 칸트의 실천 위주의 신학 방법론(?) - 은 저에게 크게 와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앙을 윤리나 실천적 차원의 문제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 실천에는 분명 이론적인 토대가 존재할 것입니다. 만약 애초에 아무런 바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실천이 알맹이 없는 몸짓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 이론적 토대를 '발견할 수 없다'면 모를까, 아예 그런 이론적 바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이론적인 바탕의 핵심이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이 질문이 굉장히 중요한 까닭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는 상태에서는 신에 관한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신의 존재 여부는 인간의 이성으로 전혀 알 수 없는 걸까요? 알 수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알 수 있을까요? 이성으로 알 수 없다면 대체 어떠한 근거로 신의 존재를 강력하게 믿을 수 있는걸까요? 전 the edge님의 신앙의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 어떠한 토대를 가지고 '신은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저도 정말 신은 분명 있다고 설득 당하고 싶단 말입니다. ㅜㅜ

      두번째로 성서에 관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인용하셨던 '계시가 모든 신학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교수님 말씀에서 시작하고 싶습니다. 이전 글에서 계시를 하나님 자체라고 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알 수는 없으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왔다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2천년 전에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직접 만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성서'라고 생각됩니다. 성서에 대한 저의 입장은 전통적인 기독교 시각과 달라서 the edge님께 좀 불편하게 들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성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성서가 수많은 사본들로 전수되었는데 그 사본들조차 서로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인간이 인간의 언어로 책을 쓴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할지라도- 언어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할 것이고, 또한 당시의 문화와 더 근본적으로는 당시의 철학을 반영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성서 또한 2천년 전의 context를 들여다 보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전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곧 철학이고, 따라서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학문을 포함해- 그 바탕에 보이지 않게 깔려있는 철학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신학이 어떤 철학의 영향을 받았든지간에 계시로부터 출발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를 봐야 한다'는 교수님의 말씀은, 계시(성서) 또한 인간이 개입되어 있는 이상 철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저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과정 신학이 성서보다는 과정 철학을 그 토대로 하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아마도 과정 신학은 과정 철학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성서를 해석하고 있다고 봐야 맞을 것 같습니다. 바르트는 칸트의 영향을 받았으니 칸트적인 시각으로, 또는 성서가 쓰여진 당시의 철학을 토대로 성서를 해석하고 있다고 보고요. 어떤 해석이 가장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는 저는 포스팅 글을 쓰신 정강길 선생님의 의견에 적극 찬성합니다. 오류와 모순, 비극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진리가 아니인 것이죠. 진리를 직접 붙잡을 수 없는 인간은 오류,모순,비극적 사건을 통해 반성하고 조금 더 앞으로 나갈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7. the edge 2009/04/17 0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질문을 두가지로 명료하게 제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하나님'에 관한 질문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알고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reasonable한 진술방식을 기독교변증학의 영역에서 정리해보았습니다.

    신존재에 관한 질문은 사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에 관한 질문입니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이 세상에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 질문의 출발점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 신도 인간도 자연도 우주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깁니다. 과연 '존재하는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져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존재론의 문제에 대해 인류가 제시하는 존재에 대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대답들을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절대적인 의미의 ‘무(無, nothing)’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즉 태초에 에너지, 질량, 운동, 인격 등이 존재했고, 이것으로부터 지금과 같은 세계가 나왔다고 하는 설명을 철저히 배제하려는 것입니다. 그저 진정한 의미에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에서 어느 날 지금과 같은 우주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하며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절대적인 무에서 유가 탄생한다는 설명을 해낸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둘째, 그렇다면 우리는 태초에 무언가 존재했었고 그로부터 지금과 같은 우주가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태초에 존재한 그 무엇이 ‘비인격적’인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은 비인격적인 기원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비인격적 근원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면,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만물은 ‘비인격적인 것+시간+우연’이라는 공식에 의해 탄생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식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인간과 우주는 어떤 의미에서도 ‘목적’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어떤 의미에서도 ‘의미’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목적’이라는 것은 ‘우연’과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이 세상이 우연하게 존재하게 되었는데, 동시에 목적이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또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의미’를 가진다는 것, ‘존엄한 인간성’을 가진다는 것은 이와 같은 공식 안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비인격적인 근원에서 시작된 것이 우주라는 대답의 핵심은 범신론(pantheism)입니다. 범신론이란 만물이 곧 신이라는 말인데, 쉽게 말한다면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의미의 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궁극적인 것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만물’ 또는 만물에 내재한 원리나 힘일 뿐입니다. 그러나 범신론이라는 용어는 스스로 모순을 내포합니다. 이 용어에 인격성을 내포하는 ‘신’이라는 말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마치 이 세상에 만물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범신론이 곧 인격성이나 의미를 내포하는 것 같은 ‘환상’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의미론적 신비주의). 따라서 범신론이라는 것은 없고, 범만물주의(paneverythingism)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만물 밖에 없다... 그 이상의 초월적이며 인격적인 신은 없다... 이것이 범만물주의입니다. 범만물주의는 따라서 인간이 왜 다른 존재들과 다르게 고귀하고 존엄하며 의미있는 존재인지에 대해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일부일 뿐이며, 도대체 차이가 없습니다. 인간이 존귀하고 의미 있는 것은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개가 존귀하고 의미 있는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범만물주의로는 절대로 진정한 ‘인간됨’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한계에 부딪힙니다.

    세째, 그렇다면 마지막 가능성은 하나의 인격적인 기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가능성 이외에 다른 기원은 불가능합니다. 절대적인 무, 비인격적 기원, 인격적 기원의 세 가지 이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간됨’을 참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인격적인 기원에서 출발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인격적인 기원을 전제한다고 해도 여러 가지 가능성을 추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격적이지만 유한한 존재, 인격적이지만 무한한 존재라는 가능성입니다. 그리스의 신들은 인격적이지만 유한한 신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모든 세상을 포괄하여 무한하고 절대적인 기초를 제공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동양의 신들은 무한하지만 인격적이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격적이면서 동시에 무한한 신을 전제하는 것은 유대-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을 다른 존재와 다른 고귀한 인간성과 인격을 가진 존재로 설명하면서, 동시에 모든 인간과 우주가 일관된 법칙 아래에 속하게 만들 수 있는 보편자, 즉 무한한 존재는 동서양을 통틀어 유대-기독교의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인격적이며 무한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전역사와 전세계를 다 고려할 때 유대-기독교에만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왜 유대교가 아니고 기독교의 답변만이 유일한 해답이 될까요? 이 세상은 일관된 원리로 움직이는 통일성 아래에 다양성이라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즉, 우주는 통일성이 있지만, 획일적이지는 않습니다. 우주가 통일성이 있기 위해서는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규정할 수 있는 인격적이고 무한한 하나님이 필요하며, 동시에 획일적이지 않기 위해서는 본래적인 다양성이 존재의 속성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이십니다. 다시 말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무한한 존재로서 유일하지만, 삼위(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통일성 속의 다양성을 갖고 계신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하나님을 기원으로 하는 이 세상도 통일성 속의 다양성이라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일신론은 통일성은 설명할 수는 있지만, 다양성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인격적이며 무한하신 하나님, 그리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전제될 때에만 우주의 존재적 속성이 온전하게 설명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곳에서도 이와 같은 설명은 없습니다. 따라서, 성서의 하나님의 존재만이 이 세상을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 대한 질문... 충분히 이해합니다. 오랫동안 많은 분들에 의해 논의되어 왔습니다.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이해에 도움이 될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리해서 다음에 보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8. the edge 2009/04/18 13: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서비평학에 관한 이야기와 논의는 수없이 듣고, 읽고, 토론하고, 생각해왔습니다. 저는 Dharma님께 그와 같은 글을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보내신 의견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양쪽 입장 모두 제게는 친숙한(?) 논의들이구요. 끝없는 평행선과 같은 생각의 주고받음만 계속되는 길임을 보아왔습니다. 오늘 저는 한 사람의 실제 삶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10대 후반, 어느 날 [그리스 철학 입문서]를 스스로 사서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을 통해 그는 삶과 삶의 의미에 관한 기본적인 철학의 문제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시작했고, 교회에 나가 목사가 설교하는 내용을 유심히 듣기도 했습니다. 그 교회 목사는 소위 '성서비평학'을 신봉하는 자유주의적 입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있어서는 철학이 유용했으나, 소년은 철학과 자유주의에서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 정직하게 답을 찾아가려는 생각 속에서 자유주의 교회에서 나오게 되었고 혼자 성서를 읽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적어도 다른 철학, 종교, 역사 서적을 읽는 만큼 성서를 열심히 읽었습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성서를 6개월 동안 통독하는 가운데 “모든 문제들이 성서 속에서 통일된 사상체계로 연결되어 마치 실타래가 풀려지듯이 다 해결된다”는 경험을 하며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는 성서 읽기를 통해 인생에 대한 철학적 문제에 대해 답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나에게 경종을 울렸던 것은 창세기였다. 내가 들어 보았던 어떤 종교의 가르침에서도, 철학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참된 해답을 창세기에서 찾았다!”는 게 그의 대답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들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라는 인식론의 문제에서 여전히 헤매고 있는 현대 철학의 난제 속에서 그는 성서가 말하는 진리가 모든 난제들을 해결해주는 가장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답변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는 물론 자신이 믿게 된 과정에 성령의 도우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고백하지만, 성령의 도우심이 그에게 열매를 맺은 방식은 기적의 체험이나 인간관계가 아니라, 바로 성서의 진리가 우리의 인생에 유일하고 참된 해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왜 기독교인이 되었을까요? 왜 예수를 믿었을까요? 기독교가 진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는 그에게 의미가 있었고 논리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삶에 대한 해답과 삶에 제기되는 문제들에 관해서 서로 대화하고 함께 나눌 수 있었던 합리적인 하나의 체계였습니다. 그러한 생각이 확고하게 그 안에 자리잡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철저히 기독교와 성서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이 처한 비정상적 상황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며 객관적인 진리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인생길은 이 진리를 변호하고 이 진리에 근거하여 살며 이 진리에 따라 믿고 살도록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그가 사랑하고 신뢰하는 주님께 속함으로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그분의 것임을 마음으로부터 알아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걷는 하루하루의 길이 되었습니다.

    이 소년의 '이야기'가 그를 이끌고 간 성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면...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있게 우리에게 파악되는 것은 성령의 내적 증거에 기반한 성서의 자증성(self-authenticating work of the Spirit)으로 가능합니다. 성령의 내증의 원리는 결코 주관주의가 아닌 성서 본문의 자증력(self-authentication)과 그 명료성을 전제로 하고 그 저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시던 성령이 그 문자에 기계적으로 구속 받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독자에게 다시 인격적으로 임하여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성서의 권위의 소재를 성령에 두는 것으로 성서 자체가 성스러운 영감받은 책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합리적인 증거도 열게 됩니다. 그러나 성서의 권위를 받든다고 하여 똑같은 해석을 하기를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경건히 또는 열심히 존경과 바른 마음으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종종 의견을 서로 달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종들로 하여금 그들이 모든일의 완전하고 충분한 지식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며 그들로 겸손하게 하며 인간이 성서의 진리를 찾아냄에 있어 서로 돕고 서로 보충하기를 권면하신다고 보기때문입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늘 깨닫는 것은 '기도'에 대한 해답은 '기도하기'에 있듯이... '성서'에 대한 해답은 '성서읽기'에...있다는 것입니다.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성서 자체... text itself를 읽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고등학교때 국어과목의 참고서로 '한샘'과 '하이라이트'... 그런 책들이 있었는데요... 가장 좋은 국어공부는 다름아닌 교과서를 직접 잘 읽는 것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예를 들어, 박목월님의 '나그네'라는 시가 교과서에 있었습니다. 시의 후반부에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과 같은 참으로 '시적인' 부분이 아직도 제게 남아있는데요... 그것은 한샘이나 하이라이트의 여러 덧붙여진 설명, 해석, 분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시인의 펜끝에서 완성된 그 시... the work itself, the text itself가 제 눈과 가슴에 직접 와 닿아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입니다. 가끔 생각해보면... 신학이 성서에서 독자를 더 멀어지게 하는 경우가 참 많다는 것입니다. 성서의 최초의 저자가 기록한 원본(autograph)은 이땅에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 있다고 해봐야 좀 더 오래된 사본, 그것보다 좀 더 오래된 사본... 들간의 비교인 것이죠. 무엇이 오리지날인가? 모릅니다.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믿을 수 없다고...!
    저는 그와 같은 의심과 질문에 I don't care... I really don't care...라고 말합니다. 저는 지금 제 앞에 있는 한국어 또는 영어 성서로 족합니다. It's more than enough actually...! 저는 원본 또는 더오래된 사본에 관심이 없습니다. 성서는 제게 personal합니다. 왜죠? 위에 언급했듯이... the text itself... 지금 제가 소유한 이 text를 읽을 때, 저는 성서 안에서 self-authenticating work of the Spirit을 늘 '경험'합니다. 이것은 체험주의도 주관주의도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거기'에 있는, 놓여있는, 펼쳐져 있는 성서에 관한 중요한 '사실'입니다. 먼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냐, 인간의 언어냐, 믿음을 갖고 읽느냐, 믿음이 없는데도 읽어야 되느냐... 등과 같은 질문에 대한 어떤 이론적 해답을 갖고 읽으려는 것보다... 저는 그렇습니다. 제가 박목월님의 시를 읽었듯이, 황순원님의 소설을 읽었듯이, 저는 성서를 읽습니다. 그저 읽습니다. 그 '읽기'가 제게 가져다 준 것은 참으로 무궁무진하기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 성서 '읽기'를 통해 'the strange new world within the Bible'을 저는 발견했고... 그것은 오래된 일이고... 참으로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일이 특별한 사건이라고 보지도 않습니다. 저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일상에서 먹고 자고 깨고 일하듯이 늘 경험하는 평범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어찌보면, 무슨 신학적인 이론이나 학문적인 설명은 제게 아무런 의미도 없을 수 있습니다. 사실 제게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아... 이런 이론이 있구나... 국어 참고서들을 뒤적였듯, 그렇게 가끔 살펴볼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참고서의 내용들이 제게 국어교과서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는 않았듯이... 수많은 성서비평학의 오래되고 다양하고 복잡한 이론들이 저의 성서에 대한, 성서 본문에 대한 태도를 조금이라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제가 오늘도 '읽을 수 있는' 그 text가 거기에, 제 앞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고교 1학년 어느날... 저를 다른 어떤 책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로 붙들며, 거기에 놀라게 했던... 로마서의 text... 그 책이 제게, 제 앞에, 이렇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Dharma님의 삶 또한 이러한 '사실'과 '함께' 걸어가는 인생길 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BlogIcon Sunny June 2009/04/20 22:51  댓글주소  수정/삭제

      the edge 님, 진솔하고 성실한 답변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기독교 신자분과 이렇게 1:1 대화를 깊게 해 본적이 없었는데 the edge님께서 저의 갈증을 많이 풀어주시네요. 혹시 블로그나 홈페이지를 운영하신다면 방문해 보고 싶은데 링크가 걸려 있지 않아 찾아갈 수가 없네요. the edge님과 계속 소통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요?

      신관을 세가지로 나누어 설명해 주신 부분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왜 기독교에서 '인격'적인 신을 강조하는 지 이해가 되네요. 다만 제 의견을 조금 덧붙이자면, 과연 비인격에서 인격적인 존재가 나올 수 없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하면 비인격적 존재에서 인격적인 존재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또 한가지 궁금한 점은 그 인격적인 신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무에서 유가 나올 수가 없는데 그 인격적인 신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인간이 세상의 최초의 근원을 알 수 없기에 더욱더 궁금한 질문입니다.

      성서에 관한 말씀도 감사합니다. 성서 본문의 내용 자체로 이미 충분하다는 말씀이신 듯 합니다. 저는 사실 성서를 읽어도 the edge님과 같은 은혜를 받지 못해서 무엇이 문제일까 고민 중입니다. 의심많은 제 기질에 문제가 있는걸까요;;; ㅎㅎ 아무튼 쌩으로 성서를 읽는 것으로는 제가 성서의 중요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서 성서를 공부하시는 분들에게서 배우려고 하는 참입니다.

      the edge님과 긴 시간 동안 (벌써 20일이나 되었군요. *.*) 함께 대화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혹시 더 하실 말씀이 계시다면 저는 언제나 환영이니 발자국 남겨주셔요. 항상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9. the edge 2009/04/21 1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블로그나 홈페이지를 운영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면 메일을 이용하시면 소통가능하구요 (theedge428@gmail.com).

    인격적인 하나님, 모든 것의 근원이신 그분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지금은 뭐라 답해드릴 수가 저로서는 어렵네요. 한번 사람들이 뭐라고 대답을 시도했는지 찾아볼 수는 있겠지요. 거기에 대한 어떤 가능한 대답을 발견하면 알려드릴께요.

    감사합니다. 저도 즐거웠구요.

    나의 주님이 Sunny June님에게도 '주님'이 되길 바라며...

  10. the edge 2009/04/22 0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앞서 보내드린 답글을 제가 후에 다시 읽고, 스스로 큰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제 마음의 중심에서 나온 정확한 대답이 아니었음을 말씀드립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 찾아볼 필요는 없을 것 같구요.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무에서 유가 나올 수가 없다면 인격적 신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는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없기에'... 그러하기 때문에... in the beginnning 하나님이 계셨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셨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이미 하나님을 '무'와 대립하는 하나의 '유'로서의 존재로 제한되는 유한한 신으로 상정하기 때문입니다. 무/유 개념은 피조물인 인간의, 피조계에 속한 개념입니다. 무/유 개념에 의해 규정되는 신존재는 신으로서의 초월성/내재성을 모두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심은 무/유 개념의 영역을 초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가 갖고있는 '존재'의 개념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 '존재'이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이라는 말의 모순을 지적, '존재 자체로서의 하나님' 또는 '존재의 근거와 깊이로서의 하나님' 등의 난해한(?) 말로 하나님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진화론 또한 그 안을 잘 살펴보면 그 안에서 스스로 여러가지 학설간의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창조론과 나름대로 'creative'한 혼합을 시도한 진화론자들도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러한 진화론과 거기에 근거한 여러가지 가능한 설명 모두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정하며 오로지 내재성만을 붙드는 것으로 인간의 taste에 맞는 어떤 새로운 '신'을 인간이 '창조', 상정한 전제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 신은 우선적으로 성서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은 아니구요. 또한, 그런 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저는 그런 신을 믿거나 그를 예배하거나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지 못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고 사랑하는가... 그분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관계는 특별합니다. 단순한 제작자와 제품의 관계를 넘어 그 안에 사랑, 의미, 목적, 계약, 구원, 역사, 실존, 영원 등에 대한 귀한 해답이 있습니다.

    성서가 계시하는 바, 하나님의 마음과 뜻, 그 사랑과 은혜가 모두 집중된 한가지 핵심, 요체, 주제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십니다. 성서를 읽으실 때 '예수님'을 '찾으며' 읽으시길 권해드립니다. 요한복음과 로마서를 정독하시면 참으로 귀한 것들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성서의 내용이 처음부터 다 이해되고 잘 읽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될 수 있으면, 힘드시더라도 성서 자체를 직접 읽으시는게 가장 좋습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그렇게 통독하는 게 부담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중 각권 요한복음, 로마서, 창세기 순으로 천천히 정독해보시기 바랍니다. 서두르지 마시구요. 그 책들이 쉬워서가 아니라, 중요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진리의 climax로서의 그 분을 바라보시기 원하는 마음으로 그 '책'을 펴시면 주님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11. the edge 2009/04/27 1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괜찮으시면 다음 웹주소로 들어가셔서... http://jintory.or.kr/...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시길 권해드리고 싶어서요.
    지난 예배방송은... 하는 말을 클릭하셔서 아래로 내려가시면 주일과 수요일 설교들이 있는데, 그 중 4월26일 주일오전 "생명나무이신 주님을 붙들자"라는 설교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설교가 시작되기 전 앞부분에 다른 순서가 좀 있는데, 설교시작부분부터 찾으셔서 들으시는 게 시간을 절약하실 것 같구요.

    생명나무이신 주님을 소개해드리고 싶어서요.
    감사합니다.^^

    • BlogIcon Sunny June 2009/04/27 20:21  댓글주소  수정/삭제

      추가적인 설명과 권해주신 웹사이트 감사합니다.
      설교 말씀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추가적인 답변에 대해 저의 의견을 조금 말씀드리자면...
      어차피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신을 논할 때에는 인간의 범주 안에서 설명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다'라는 답변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설명아닌(?) 설명이 남용되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으니까요. 신이 인간을 초월하는 데에는 동의합니다만, 그 내재성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제가 듣기로는 Ken Wilber라는 사람이 이 부분을 굉장히 잘 다룬 것 같습니다. 내재성만 강조한 범신론과 초월성만 강조한 기존 신론을 뛰어넘어 세계 안에 내재하면서도 그를 초월한 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 이 분의 설명에도 확신을 가지기 힘듭니다. 전 불가지론자에 가까운 듯해요.)

      the edge님께서는 종교 다원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궁금하네요. 저에게는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모두 신성, 또는 세계의 본질을 깨달은 위대하신 분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진리로 갈 수 있는 문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반드시 기독교에서만 통하는 진리는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단지 그 하나님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각기 다른 답을 가지고 있겠지만요.

      음... 쓰고 보니 제가 좀 공격적으로 썼네요. ;;;
      마음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12. the edge 2009/04/29 04: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Ken Wilber에 대해서는 잘은 모르지만,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소개해주셔서 감사드리구요. 살펴볼 가치가 있는 분 같네요. 그에 대해 이해하려면 꽤 시간을 들여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군요.

    타종교와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가 "예수님이 fully divine, and fully human"이라는 타종교인들에게는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는 기독론 (Christology)의 핵심에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가 공격받는 그 배타성의 뿌리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님은 '신성, 또는 세계의 본질을 깨달은 위대하신 분'으로서 소위 '4대성인'중의 한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Come to me!"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쉬게 해 주신다면서 말입니다. 부처님처럼 더 어찌보면, 합리적이고 신사적이고 인간적으로 사람들에게 스스로 '득도'하고 '해탈'할 것을 권하며, 자신도 겸손하게 그렇게 앉아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로 황당하리만큼 건방지고 오만하며 독선적으로 보이기까지 말입니다.

    하지만, 복음서에 의하면 아시듯이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의 친구셨고, 가장 marginal한 people group과 가까이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사형수로 '처참하게' 처형당하셨죠.

    뭔가 잘 이해되지 않고, 앞뒤가 안맞는 그런 생애가 그분의 짧은 33년의 지상에서의 삶일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bother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요... crucial... crucifixion... on the Cross... 거기에 focal point가 있겠지요.

    제게는 예수님만이, 그분의 십자가만이... 저의 실존의 심연... 그 깊이에 있는 '나'를 해결해주었습니다. 부처님의 해결방식은 제게 너무 버겁고, 또 해결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encounter한 예수... 그 이름에서 저는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다른 종교들에는 없는 the radical LOVE를 말이지요...
    사랑이 진정한 power인 것 같아요...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 참 그다지 공격적으로 쓰셨다고 생각한 적 없으니 염려 놓으시지요... ^^

    • BlogIcon Sunny June 2009/05/03 17:11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말 예수님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같습니다. 하지만 그 삶 속에서도 '사랑'이 그 핵심임에는 저도 the edge님에게 동감합니다. 그 사랑의 깊이를 제가 과연 깨달을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저에겐 아직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하네요. 더 공부하고 노력해야 할 듯 합니다.

  13. the edge 2009/05/10 19: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한복음 3장, 4장...과 로마서 3장, 4장, 5장... 이렇게 다섯 장을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때로는 우리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만 붙들고, 그 많은... 좋아보이지만 번거로운 것들은 제외시키고 버려야 할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단순하고 간결하지만, 가장 잘 만나실 수 있는 곳이 위에 언급해드린 요한복음과 로마서의 말씀들이라 여겨집니다. 성서 지식은 해박하지만 예수님과 먼 사람들도 많은 줄 압니다. 예수님께로 가는 길은 많은 지식과 노력으로 갈 필요도 없고, 갈 수도 없는 줄 압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길은 단순하고 쉬운 길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를 생각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모시는 자를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주님(the LORD)... 헬라어의 kurios(큐리오스)는 나(인간)와 그분과의 언약적, 생명적 관계를 나타내는 참으로 그 관계의 아름다움에 근거한 그분에 대한 '호칭'인데요. 사도 바울의 놀라운 통찰이었습니다. 구약의 그 야훼가, 그 하나님의 이름이 이 주님으로 우리에게 신약에서 다가오셨습니다. 그분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이 주님과 오늘 하루길 함께 가는 외롭지 않고, 따뜻하며, 그런 은밀한 사귐이 있는 매일매일이 크리스천의 삶이라고 믿어집니다. 나의 어떠함이 나를 이루는 것이 아니고, 나의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나의 주님... 그분의 어떠하심때문에... 그 그늘에 안식하며, 숨을 수 있는 비밀때문에, 그 복된 '여유'때문에... 내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이 길에서 지치지 않고, 솟아오르는 마음으로 머무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Sunny June님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저 simply... Sunny June님께 '사귐'으로 '쉼'으로 다가가고 싶어하십니다. 세상 어디에도 그분같으신 분 없구요. 그분만큼 우리를 '위한' 분도 없으신 것 같습니다. 이 나의 주님... Sunny June님께도 그러한 주님이 되시길 오늘도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8/11/16 15:41

The absence of fear is not courage;

the absence of fear is some kind of brain damage.

 

Courage is the capacity to go ahead in spite of the fear,

or in spite of the 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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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ny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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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6 15:37

당신에겐 철학이 있습니까(보급판 문고)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박이문 (미다스북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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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을 견딜 수 없는 이들로부터 위대한 창조적 업적을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창조하는 인간도 언제까지고 혼자된 상태에서 혼자 산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아프다. 혼자됨이 논리적으로 곧 고독을 함축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고독, 즉 일종의 쓸쓸함, 아픔으로 변한다. 인간은 형이상학적으로 각자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유일한 존재이지만, 그와 동시에 동물적으로 나 아닌 남과의 만남, 타자와의 대화 그리고 상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인간을 꿈꾸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타자로부터, 무리들로부터 그리고 일상적 생활로부터 의식적으로 잠시나마 떨어뜨려서,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을 전혀 갖지 못하는 인간의 삶을 정말 인간다운 삶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한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만 인간은 비로소 세계와 자신 그리고 그러한 것들의 의미를 조용히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반성할 수 있는데, 그러한 주체적 인삭과 반성이 전혀 부재한 인간의 삶을 인간다운 삶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까지나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 속에 갇혀있을 수 없다. 그는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러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반성하면 할수록,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인간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궁극적 한계를 의식하며, 지적으로는 그 어떤 이로부터도, 그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쓸쓸함과 허탈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 아닌 누군가로부터, 무엇인가로부터 도움과 위로를 구하지 않을 수 없는 애처로운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혼자됨이 곧 고독은 아니지만, 적어도 인간의 경우 혼자됨은 궁극적으로 고독할 수 밖에 없다.

 

   혼자됨은 고귀할 수 있지만 쓸쓸할 수도 있는 계기가 되며, 자부심의 준거일 수 있지만, 고통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고독은 실존을 일깨워주는 귀중한 경험이지만 그것을 오래 견디기에는 너무 괴롭고, 인간됨의 경험일 수 있지만 그것을 참기에는 너무 슬프다. 주체적이고 창조적 삶을 살기 위해서 나는 혼자됨 속에서 언제까지나 버티고 있어야 할 것인가? 인간은 고독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주체성과 창조적 업적을 위해서, 고독한 수도원, 암자, 연구실에서 나와 인간 공동체의 따듯함을 느낄 수 있는 가정, 고향, 시장으로 돌아가 대중적이 되어야 할 것인가? 공동체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인간미의 포기, 즉 고독의 감수라는 대가를 치룬 '위대함'이라는 성취가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떠들썩한 시장 속에서 고독을 전혀 모르고 지낸 인생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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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ny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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