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03 17:06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여도 이가 하늘의 뜻과 어긋남이 없는 경지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강길님의 책을 보다가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발견한 것 같아서 기쁜 마음에 적어둔다.


언제나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한 상황에 민감하라.
이것은 <나의 실존>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여건>에 대한 가능한의 객관적 분석과
이에 대한 최선의 합리적 판단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이에 대한 계속적 수련을 쌓는 것이 바로 만무滿無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다.

정강길,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 신학, p259

Posted by Sunny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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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6 22:31

 In Buddhism, we do not actually use the word "reincarnation." We say "rebirth." But even rebirth is problematic. According to the teachings of the Buddha, "birth" does not exist either. Birth generally means from nothing you become something, and death generally means from something to nothing. But if we observe the thing around us, we find that nothing comes from nothing. Before its so-called birth, this flower already existed in other forms - clouds, sunshine, seeds, soil, and many other elements. Rather than birth and rebirth, it is more accurate to say "manifestation" and "remanifestation." The so-called birthday of the flower is really a day of its remanitestation. It has already been here in other forms, and now it has made an effort to remanifest. Manifestation means its constituents have always been here in some form, and now since conditions are sufficient, it is capable of manifesting itself as a flower. When things have manifested, we commonly say that they are born, but in fact, they are not. When conditions are no longer sufficient and the flower ceases to manifest, we way the flower has died, but that is not correct either. Its constituents have merely transformed themselves into other elements, like compost and soil. We have to transcend notions like birth, death, being, and non-being. Reality is free from all notions.


Thich nhat hanh, Living Buddha and Living Christ



이와 비슷한 내용이 틱낫한 스님의 <죽음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에 아주 자세히 잘 설명되어 있다. 나에게 이 책은 정말 큰 깨달음을 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개념이 확실하게 잡혔기 때문이다. 왜 불교에서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 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지 얼마 안되어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때 난 틱낫한 스님의 말씀이 더욱 와닿았다. 할아버지의 육신은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할아버지는 다른 형태로 내 곁에 머물러 계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슬퍼하지 않았다. 슬퍼할 이유가 있다면 이제 할아버지와 예전처럼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이야기하지 못한다는 것이 슬플 뿐이다. 그러나 나는 강력하게 믿는다. 할아버지는 4월의 봄바람에도, 길가에 피어 있는 한 송이 꽃에도 계시다는 걸. 그래서 난 할아버지를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더 확장되어 이런 생각도 들게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변할 것 같지 않은 이세상, 그래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 아둥바둥 해봤자 소용없다는 비관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우다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은 세상 어딘가에 다른 형태로 살아 숨쉬고 있다는 희망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하여 절망적인 세상에서 희망의 맥을 찾을 수 있었고 나 또한 그 희망에 동참하리라는 결심도 해보았다.

Posted by Sunny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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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6 21:58
1. WHY : 왜 타인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

아직까지 이 질문에 대해 확신에 찬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진화론에서는 이타주의를 상호호혜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이 설명은 마더 테레사의 헌신적인 사랑을 설명하지 못한다.
마더 테레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중에 무엇을 받기 위하여, 또는 천국을 가기 위하여 사랑을 베풀지는 않았으니까.
성서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 계명을 주셨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그런데 왜 그런지는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_-;;
불교에서는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로 空을 말한다. 우주의 만물은 각기 존재하지 않고 연결되어 있으므로 다른 생명을 사랑하는 일은 곧
자신을 사랑하는 일과 같다고 말한다.
정강길 선생님 말처럼 신의 장대한 계획 - 만인을 위한 세상- 을 실현하기 위해, 즉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함일까?
음... 또는 계몽적 관점에서 만인은 평등하므로 모든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타인을 위해야 한다는 걸까?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한다면, 나에게 가장 와닿는 설명은 불교적 설명이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으니 타인을 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을 택한다 하더라도 나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이 대치될 때 타인의 이익을 선택할 명분이 되지는 못한다. 타인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것이므로 타인을 위하는 것이지, 나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이 반할 때마저도 굳이 나를 희생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대체 고통받는 생명을 위해 나를 버려야 하는 이유가 뭘까?!

사람 노릇하면서 사는 게 당연하지, 고통받는 생명을 보면 도와줘야 하는게 인지상정! 이라고 하신다면 나도 물론 동의.
하지만 그게 다란 말인가. 진화론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감정의 흐름이 그러하기 때문에 남의 고통을 보면 덜어주어야 한다는 건가.
이쯤되면 남편의 다소 씨니컬한 주장처럼 '어차피 지구는 언젠가 없어질텐데, 왜 굳이 모든 생명이 행복하고 평화로워야 하는건데? 사자가 물소를 잡아먹는게 당연한거야. 잡아먹히는 물소는 행복하지 않잖아. 인간 세상도 그래. 세상이 원래 그런거야.' 라는 말이 나오려 한다. -_-;;
** 취소선 그은 윗 문장은 제가 남편을 오해하고 적은 무지의 소산이예요.  남편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수정합니다. 미안해 남편- 내가 졸지에 남편을 살 의욕없는 허무주의자 & 회의주의자로 만들었네. 사실 남편의 저 말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남을 도우면서 살아야지'라는 뭇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했던 말이었습니다. 남편은 타인을 도와야 하는 이유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과 나는 경계가 없기 때문 - 모두 연결되어 있음- 이라고 굳게 믿고 있어요. 제가 그런 남편의 삶의 태도를 무시한 채  제 멋대로 남편의 말을 확대 해석했네요. 이 포스트 보고 앞으론 제 블로그 감시체제로 들어가야 겠다는 남푠-. 정말 미안해용!

이 문제는 '선과 악'의 시초와도 관련이 되는 것 같다. 타인을 위한 삶이 선이라고 느껴지는 이 감정은 단순한 사회화의 결과일까, 아니면 신의 존재 때문일까.

왜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아시는 분은 답글 좀 달아주세요. 나도 개과천선 하고 싶어요.

* 덧붙이기 : 나쁜 짓하면 지옥에 가니까 착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건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주신다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기에 이런 종류의 논의는 애초에 제외했음.


2.  HOW : 타인을 위한 삶은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WHY에 대한 대답이 나왔다고 치자. 타인을 위한 삶은 바람직하다는 답이 나왔다. 그리고 그 이유는 만인이 평등하게 행복하길 원하는 신의 뜻이라고 하자.
(선의 시초를 계속 거슬러 가보면 막판에는 신이 언급되는 것 같다. 이 또한 확실하지 않지만.)  앞으로 이어질 내용은 정강길 선생님의 저서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 신학> 을 보고 상당히 감명받은 부분이라 옮겨 놓으려고 한다.

신은 모든 생명이 행복하길 바란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이러한 신의 뜻을 깨닫고 있지는 않다. 많은 인간이 고통받는 생명을 도우려 하지도 않거니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만 바빠 고통받는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나 인내심 강한 신은 끊임없이 인간을 설득 중이다. 저 많은 고통을 보라고. 그리고 나와 함께 모든 생명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자고 속삭이면서. 신이 인간을 설득한다고 한 이유는 인간에게는 선택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해도 인간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세상은 신과 인간이 더불어 만들어 가는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개념은 '우선성의 원리 principle of preference'이다. 신은 모든 생명에 보편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통받는 생명을 그렇지 않은 생명보다 우선시 한다. 만약 고통받는 생명과 그렇지 않은 생명에 똑같은 사랑을 준다면 여전히 불균형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모든 만물이 행복해지기 위해 일시적으로 고통받는 생명을 우선적으로 돌보는 것이다. 이를 정강길 선생님은 우선성의 원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앞서 내가 언급한 '타인을 위한 삶'이란 정강길 선생님 입장에서는 우선적 민중 preferential minjung을 위한 삶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제까지 언급한 신과 인간의 관계를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신의 본성                               +                 개인의 결단                        =       우선적 생명을 위하는 삶
(만물을 위하는 보편적인 사랑 & 우선성의 원리)        (깨달으라는 신의 계시에 대한)         (궁극적으로는 모든 생명의 행복과 평화)




Posted by Sunny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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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5 15:58
난 오랜 시간 성당에 다녔었고 지금도 교회 예배를 나가지만, 마음 한 켠의 찜찜한 구석을 숨길 수 없다.
그 찜찜함은 '왜 애초에 신이라는 존재를 상정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에서 나온다.

전지 전능하고 선하신...이라는 신의 특성 또한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신 그 자체에 대한 의문이다.
자신에게 간절한 소망이 있는데 그 소망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기도를 하는 대상으로서의 신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또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을 그저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성경 구절을 근거로 믿기에는 매우 부족한 느낌이다.
그렇다면 직접적인 체험은 어떠한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하나님 체험' 은?  
하지만 나에겐 그러한 체험도 의문 투성이이다. 그것이 정말로 신적인 체험인지 아닌지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굳이 신을 상정하지 않고도 그러한 체험을 심리학,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러한 하나님 체험을 정말 신적 체험이라 말할 수 있을까?
현재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뇌과학을 바탕으로 설명되지 않을까?!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이성을 모두 소진하고 나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영역이 있을 때,
그 막다른 지점에 이르러서야, 그 때서야 '그 어떤 것(신)'이 있다고 조심스레 얘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게 나의 생각이다.
(덧붙이자면, 나는 신적인 영역이 존재한다 해도 그 영역을 100%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성으로 전혀 알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에는 쌍수들고 반대한다. 신적인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포함하면서
초월하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능력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이러한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것이 '과정신학'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한번 공부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 세기연의 홈페이지를 돌아보다가 <무신론 진영이 설명 못하는 난점>이라는 글을 보았다.
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자신의 철학에서 애초에 신을 가정하고 논의를 진행한 것이 아니라,
논의를 진행하다보니 불가피하게 'X'라는 존재를 설정해야만 하는 논리적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X를 신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그 불가피한 논리적 상황이 무엇이었을까? 정강길님은 그 상황을 1. 우주의 창발성(novelty)과 2.질서와 혼돈의 대비되는 느낌의 시원 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주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사건이 계속 일어난다. 기존에 없었던 새로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무에서 유가 나오는 걸까?
우리가 질서와 혼돈을 구별하고, 그를 대비시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데 그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X(신)'를 제시하고 있다.

음..
그렇다면 난 이게 또 궁금하다.



그 X는 어디에서 온걸까?




하하하...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음....
도대체 이 세계의 근원은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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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ny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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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9 19:02
1. 한 스님의 강의

유튜브에서 한 스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불교의 깨달음, 즉 '있는 그대로를 올바르게 아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내용이었다.
요즘 배우고 있는 부분과도 관련이 있어서 아주 흥미롭게 봤다.



스님이 말씀하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실제의 세계는 내가 바르게 인식하던 잘못 인식하던 나의 의식과는 상관 없이 알아서 돌아가고 있다. 만약 내가 실재를 잘못 인식하고 있다면 두가지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첫째, 잘못된 인식이지만 이로 인해 크게 문제가 없는 경우
둘째,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는 경우

첫번째의 경우, 법륜 스님이 드신 예는 농부의 예이다.  A라는 신을 믿는 농부는 농사가 잘될 때 자신이 A를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B라는 신을 믿는 농부는 자신이 믿는 신 덕분에 농사가 잘 되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농사는 애초에 농부가 믿는 신과는 관계가 없다. 농부가 A라는 신을 믿던 B라는 신을 믿던 농사는 실제 세계의 법칙대로 지어진다. 농부의 예처첨, 인간은 하나의 사상, 종교, 철학에 갇혀 있을 때 실재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착각 속에 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착각은 농사를 짓는 데에 크게 지장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두번째의 경우처럼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예상하지 못한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는 일도 많다. 이는 마치 쥐가 살려고 쥐약을 먹었지만 죽는것과 같다.스님꼐서 두번째의 경우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이 부분은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설명을 덧붙이자면, 아마도 우리가 자신이나 타인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생기는 수많은 오해와 착각이 바로 이 두번째 경우가 아닐까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상대방을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자신이 사랑한건 자기 자신인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나 자신도 괴로울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상처를 주기 쉽다. 실재를 잘못 인식하여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는 경우이다.
 
따라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실제의 세계와 내가 인식하는 세계 간에 차이가 있을 때 우리는 괴로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올바른 인식, 즉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곧 석가모니이며, 이러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도들의 목적이다.


2. 우리는 실재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가?

2.1. 철학자 - 실재의 올바른 인식은 가능하지 않다

농부가 실재하는 법칙을 올바르게 인식하던 그렇지 않던 그 법칙은 항상 존재하고 그대로 흘러간다는 스님의 말씀은, 주체가 인식하던 인식하지 않던 세상은 존재한다는 철학적 접근과 비슷하다. "실재가 존재하는가, 하지 않는가"는 철학의 큰 주제이다. 내가 경험하는 세상이 실제로는 우리 경험과 다른 세상이라면 이 얼마나 황당한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그래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상이 정말 있는 그대로의 세상인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많은 철학자들이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우리의 감각 정보일 뿐이라고 주장했었다. 내 앞에 놓여있는 탁자는 실재하는 탁자가 아니라 나의 감각 기관으로 들어온 데이타일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진정한 탁자를 볼 수 없다. 그저 탁자의 그림자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Russell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진정한 탁자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sense-data를 통해 실재하는 탁자의 일부분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탁자의 진정한 모습이 있기나 한걸까?
세상은 우리의 sense-data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우리가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는 진정하고 실제적인 세계를 꼭 전제해야 하는걸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실재하는 세계는 "없다". 모든 건 우리의 감각정보일 뿐이다.'라고 급진적으로 주장한 사람들을 idealist라고 한다. 곧 우리가 감각 기관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사람들의 주장에 따라 예를 하나 들어보자.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 만약 그 어느 누구도 이 나무를 인식하고 있지 않다면 그 나무는 세상에 존재하하지 않으며, 누군가가 그 나무를 보거나 만질 때, 그때서야 나무는 존재하기 시작한다.

Russell은 이러한 idealist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든다.
만약 실제의 세계는 없고, 모든 것이 우리의 감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세상을 설명하기가 너무 복잡해진다고.
내가 고양이를 한 마리 기르고 있는데, 어느 날 고양이를 집에 두고 하루 종일 외출했다가 밤 늦게 들어와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나는 아침에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집을 나갈 것이다. 집에는 고양이뿐, 다른 누구도 없다. 나는 하루 종일 밖에 있다가 밤 늦게 들어왔다. 고양이는 나를 보자 마자 밥을 달라고 재촉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제 이 상황을 idealist의 주장대로 해석해 보자. 앞서 이야기했듯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고양이를 인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고양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아침에 밥을 주고 집 밖으로 나가면 아무도 고양이를 인식할 수 없으므로 고양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밤에 돌아와서 다시 고양이를 인식했을 때부터 고양이는 다시 존재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고양이의 배고픔이다. 내가 집에 없는 동안 고양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고양이는 배고플 새가 없었을 것이다. 고양이의 입장에서 보면 아침에 자신은 밥을 먹었고, 주인이 나가자 세상에 없었다가(밥을 소화시키고 에너지를 쓸 시간이 없다) 주인이 돌아오자 다시 뿅 나타나는 거다. 즉 고양이는 주인이 밤에 돌아왔을 때 계속 배가 불러 있는 상태여야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고양이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던 그렇지 않던 때가 되면 배가 고프다. 이렇게 간단한 현상을 idealist의 관점에서 설명하려면 상당히 복잡하고 어렵게 된다. 설명력이 부족하므로 좋은 이론이 아닌 것이다.

http://i.kdaq.empas.com/imgs/qrsi.tsp/5969811/10611114/0/1/A/%EA%B3%A0%EC%96%91%EC%9D%B4.JPG

요렇게 깜찍한 놈이 보지 않을 땐 없어진다면 너무 아쉽잖아. =.=



2.2. 불교도 - 실재의 올바른 인식은 가능하다


Russell의 반박으로 idealist의 주장은 빛을 잃었다. 실재하는 세상은 누군가가 인식하던 하지 않던 항상 존재하며 나름대로 움직인다.  앞서 스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문제는 이 실재하는 세계, 그리고 이 세계가 돌아가는 법칙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느냐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재를 감각 기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것도 일부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철학의 논의는 여기에서 끝나는 듯 하다. 그러나 종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그 방법으로 불교에서는 실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깨달은 사람인 석가모니를 모델로 그의 수행 방법을 배우고, 그와 같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쉼없이 수행하기를 권한다.

철학의 결론대로, 우리는 감각 정보를 통해 실재를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실재를 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깨달은 사람들이 적지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긴 수행의 시간이다. 석가모니가 진짜 깨달았는지 안했는지 내가 증명할 방법이 없기에 이 부분은 미스테리이지만, 난 깨달았다고 믿기 땜시롱 나의 결론은 이러한 거지-. 이제 나에게 필요한건 수행.


Posted by Sunny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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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5 00:21
With a wish to free all beings
I shall always go for refuge
To the Buddha, Dharma, Sangha
Until I reach full enlightenment.

Enthused by wisdom and compassion,
Today in the Buddha’s presence
I generate the Mind Wishing Full Awakening
For the benefit of all sentient beings.

As long as space remains,
As long as sentient beings remain,
Until then, may I too remain,
And dispel the miseries of the world.

(Dalai Lama, An Open Heart 에서 발췌)

Posted by Sunny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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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31 15:56
Genuine compassion must be unconditional. We must cultivate equanimity in order to transcend any feelings of discrimanation and partiality. One way to cultivate equanimity is to contemplate the uncertainty of friendship. First we must consider that there is no assurance that our close friend today will remain a friend forever. Similarly, we can imagine that our dislike for someone will not necessarily continue indefinitely.

Another way of cultivating equanimity is to reflect upon how we are all equal in our aspiration to be happy and overcome suffering. Additionally, we all feel that we have a basic right to fulfill this aspiration. How do we justify this right? Very simply, it is part of our fundamental nature......In our meditation we must work at cultivating the attitude that "just as I myself have the desire to be happy and overcome sufferings, so do all others, and just as I have the natural right to fulfill this aspiration, so do all others."

It is best to cultivate the feeling of equanimity by first focusing on relative strangers or acquaintances, those for whom you have no strong feeling one way or the other. From there you should meditate impartially, moving on to friends and the enemies. Upon achieving an impartial attitude toward all sentient beings, you should meditate on love, the wish that they find the happiness they seek.... When you have watered your mind with love, you can begin to meditate upon compassion. Compassion, here, is simply the wish that all sentient beings be free of suffering. (Dalai Lama, An Open Heart)

* equanimity, : 마음의 평정, 침착함, 태연함

자비심을 기르려면 남과 나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마음을 없애야 한다. 특히 다른 사람을 나의 친구 또는 적으로 나누는 마음을 없애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평정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평정심을 기르기 위한 첫번째 방법으로는 현재의 친구가 영원히 친구이리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듯이 영원한 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두번째 방법은 내 자신이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극복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염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두가지 방법으로 분리된 마음에서 벗어나 평정심을 기르고 나면 사랑에 대해 명상한다. 사랑은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찾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차고 나면 이제 자비심에 대한 명상을 한다. 이 때의 자비심은 모든 존재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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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ny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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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9 16:17

1. 괴로운 감정을 다스리는 세가지 단계

     Mental afflictions do not simply vanish over time. They come to an end only as the result of conscious effort to undermine them, diminish their force, and ultimately eliminate them altogether.
If we wish to succeed, we must know how to engage in combat with our afflictive emotions We begin our practice of the Buddha’s Dharma by reading and listening to experienced teachers. This is how we develop a better picture of our predicament within the vicious circle of life and become familiar with the possible methods of practice to transcend it. Such study leads to what is called “understanding derived through listening.” It is and essential foundation for our spiritual evolution. We must then process the information we have studied to the point of profound conviction.This leads to “understanding derived through contemplation.” Once we have gained true certainty of the subject matter, we meditate on it so that our mind may become completely absorbed by it. This leads to an empirical knowledge called “understanding derived through meditation.”
These three levels of understanding are essential in making true change in our lives. (Dalai Lama, An Open Heart)

1단계는 앞서 괴로운 감정을 잘 다스렸던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말씀을 잘 생각해 보고 분석해 보는 것이 2단계이다. 이 단계를 거치면서 가르침의 의미를 알게 되고 확신을 가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확신이 든 가르침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명상의 단계를 거친다. (2단계와 3단계는 meditiaton의 두가지 종류인 analystic meditation, settled meditation과 각각 상응한다.) 이 세 단계를 거치면서 나보다 앞서 괴로운 감정을 훌륭히 다스렸던 분들의 가르침을 나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다.


2. 괴로운 감정에 휩싸이지 않기 위한 십계명

     Initially, it is impossible to combat these negative forces directly. We must approach them gradually. We first apply discipline ; we refrain from becoming overwhelmed by these emotions and thoughts. We do so by adopting an ethically disciplined way of life. For a Buddhist, this means that we refrain from the ten nonvirtuous actions. These actions, which we engage in physically by killing and stealing, verbally by lying or gossiping, and mentally coveting, are all expressions of deeper mental afflictions such as anger, hatred, and attachment. (Dalai Lama, An Open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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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ny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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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7 22:39
1. Ken Wilber가 말하는 자비와 사랑

     모든 것이 holon이고 온 우주가 holarchy적이라는 Wilber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곧 우리 내부를 파괴하는 일이다.우주는 matter에서 life로, life에서 mind로 진화해왔다.

인간은 biosphere를 포함하면서 동시에 이를 초월한 존재이므로, 만약 biosphere를 파괴하면 곧 자신을 구성하는 한 요소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한참 후 결과적으로 나를 파괴하는 외부의 어떤 대상을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라, 곧 나 자신을 구성하는 부분을 직접적으로 파괴하는 자살 행위이다. 이러한 설명은 왜 다른 생명을 소중히 하고 그들에게 자비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잘 말해준다.


The point of genuine environmental ethics is that we are supposed to transcend and include all holons in a genuine embrace. Because human beings contain matter and life and mind, as components in their own makeup, then of course we must honor all of these holons, not only for their own intrinsic worth, which is the most important, but also because they are components in our own being and destroying them is literally suicidal for us. It’s not that harming the biosphere will eventually catch up with us and hurt us from outside. It’s that the biosphere is literally internal to us, is a part of our very being, our compound individuality-harming the biosphere is internal suicide, not just some sort of external problem. (Ken Wilber, A Brief History of Everything)


2.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와 사랑

     holarchy라는 개념 대신 '空'을 이용한다는 점만 빼고는 달라이 라마나 틱낫한 스님도 Ken Wilber와 비슷한 목소리로 자비심을 설명하고 있다. 현재 내가 이해하고 있는 '空'이란 우주 만물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모든 만물은 혼자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상호 의존하며, 따라서 어떤 존재도 혼자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은 비어있다, 즉 空이다. 결론적으로 空은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다른 말이다. (틱낫한 스님의 책에서 본 내용)

이러한 空 개념에 따르면, 타자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곧 나에게 해를 끼치는 일과 동일하다. 또한 타자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것은 나를 배려하고 사랑한다는 것과 같다. 내가 남에게 행하는 모든 일의 결과는 결국 나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간단한 예로 내가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자꾸 거짓말을 한다고 해보자. 거짓말을 하면 단기적인 이익을 취할 수 있을지 몰라도결국엔 내 주변 사람들은 나를 믿지 않게 되고, 그 결과 나는 외톨이가 될 것이다.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진심으로 대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나를 믿음직스러운 친구로 여길 것이며, 그들도 나에게 진심으로 대할 것이다.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매우 명확하다. 내가 밥 한공기를 먹으려면 벼를 길러주는 햇빛과 비, 벼를 키우는 농부, 그리고 쌀을 포장하는 공장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이유인 그들의 부모, 그리고 또 그들의 부모가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을 확장시키다 보면 밥 한공기에는 온 우주가 들어 있다. 밥 한공기만 봐도 모든 만물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네가 있음으로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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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ny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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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30 20:17

(이 글은 오래전 1998년도에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인간현상」(한길사)을 읽고서 쓴 글이다. 현재 기독교 안에서 논의되는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정보 제공과 참조 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올린 글임을 밝혀둔다. -정강길)

1. 들어가며

98년 8월 12일자 <뉴스위크>를 보면 '과학과 종교의 절묘한 조우'라는 타이틀의 기사가 나온 적 있다. 기사의 내용에 따르면 바야흐로 회의(懷疑)에서 출발하는 과학과 믿음에서 출발하는 종교가, 하나의 지평에서 만나게 되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과학과 종교가 서로 상대를 부인하는 적대관계였지만, 이제는 과학과 종교가 상호적으로 관계되면서 이전의 근대성에서 벗어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우리 가운데 불러일으켰다. 앞으로 과학자들은 종교인들과 더는 골치 아픈 싸움에 휘말리지 않아도 될 것이며, 종교인들은 자신의 신앙심과 과학적 사유의 충돌로 인해 혼란에 빠지는 일 또한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극히 과학적인 사실을 파면 파고들수록,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종교적인 섭리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점점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2. 과학과 종교의 대립과 갈등

근대 세계의 인식의 문을 연 데카르트는 인간의 '생각함'을 주체로 내세우면서 중세 신앙이 갖고 있던 사유의 벽을 깨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는 자연 과학의 발달을 촉발시키는 데에 그 철학적 근거를 세웠다. 그러나 주체와 객체를 이원론적으로 보는 인식의 이러한 흐름은 과학과 종교를 점차 분리시키면서 그 골을 계속 깊어만 가게 했다.

이때 등장한 세계관이 우리가 흔히 잘 아는 이신론적(理神論的) 세계관이다. '이신론'이란 신이 이 우주를 창조할 때 우주를 돌아가게 하는 이치를 창조하여, 신은 이 우주가 돌아가는 일에 손을 떼버렸다는 신관이다. 그래서 당시 갈릴레오는 이 우주를 가리켜 "수학의 언어로 쓰여진 바이블"이라고 하기까지 했다.

이신론은 근대 자연과학자들이 유신론자들의 눈치를 보며 궁여지책으로 짜낸 유물론을 향한 유아기적 항변이요 음모라고 할 수 있겠다. 17세기에 등장한 뉴턴 물리학은 과학적 유물론의 결정판이자 인간 이성의 위대성에 대한 절정을 이뤄놓았다. 뉴턴 물리학이란 그 옛날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데모크리토스 원자론의 세련된 예증에 다름 아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들만이 인정받는 이러한 분위기는 끝내 종교를 부정하는 무신론과 유물론을 본격적으로 등장시켰고, 과학과 종교의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대결로 치닫게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특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일수록 두드러지게 과학과 종교를 대립적으로 보면서 이를 경시하고, 더러 기독교 신자에 처해있는 과학전공자들 가운데는 신앙이라는 명목 하에 분명하게 일반화된 사실조차 조작한다. 과연 과학과 종교는 서로를 부정해야만 하는 입장일 수밖에 없는가?

3. 떼이야르가 말하는 우주의 진화

   

▲ 'Pierre Teilhard de Chardin'(1881~1955)

여기에 대해 단호히 "그렇지 않다"고 20세기 초에 일찌감치 해결책을 제시했던 자 중에 하나가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이라는 학자이다. 그의 실존적인 삶의 자리가 이미 프랑스의 종교신부이자 고고학자요, 지질학자며, 생물학자였기에 이 심각한 주제와 그는 필연적으로 부닥치게 되어 있었다.

그는 물질을 얘기하는 과학의 비물질성을, 또는 종교에서 말하는 정신에너지(얼)의 물리적·생물학적 작용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며, 다가올 21세기에도 지속적으로 유효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그가 기술하는 우주는 정태적이고 불변적인 정지한 우주가 아니라 진화의 과정상에 있는 역동적인 우주이다. 특히 그의 대표적 저서인 「인간현상」(1939)은 이를 잘 얘기하고 있다.

태초에 우주가 발생하고 태양의 파편으로부터 나와 형성된 '청년지구'는 무기물과 유기물을 구성하면서 생명 현상을 출현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떼이야르는 무기물계와 생명계라는 두 세계는 본래부터 한 몸이었다고 한다. 단세포 단계에서는 동물과 식물의 구분이 불분명하듯이, 그것은 낮은 단계에서는 모호하고도 희미한 존재로 있었을 뿐이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떼이야르는 이것을 '이른 생명'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사물의 바깥만을 살피는 자연 과학으로 볼 때에 그것이 뚜렷한 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적어도 세포가 출현했을 때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이른 생명이 '생명'을 낳았다고 보는 것이다. 생명은 적극적으로 팽창하여 오늘날 우리가 아는 계통수의 생물을 번식시키고, 영장류의 진화과정을 거쳐서 결국은 인간현상을 태동시킨다.

사람은 조용히 등장했다. 사람의 등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곧 ‘생각’의 등장을 의미한다. 사람은 자신을 대상으로 놓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헤아릴 줄 아는 '반성'의 능력을 갖고 있다. 여기서부터 진화의 흐름은 이제 정신의 적극적인 진화에 돌입했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얼누리'(=정신계)의 형성이다. 사람 이전에 얼은 있었어도 얼누리는 없었다. 사람의 등장과 더불어 이제 본격적인 '정신의 진화'에 돌입한 것이다.

사람의 등장은 곧 정신사의 등장을 의미했다. 얼의 본격적인 진화는 이러한 얼을 하나로 수렴하는 양태로 나타난다. 즉 저마다의 무수한 생각의 알갱이들이 하나의 거대한 생각 덩어리로 합일되는 것이다. 조화로운 집단의식, 그것은 곧 '초의식'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또한 사람이 모여서 '큰 사람'이 되는 차원을 의미한다. 세계의 미래는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라는 진화의 궁극점에 이르러 '큰 사람'의 모습을 띤다는 것이다. '큰 사람'은 개체의 특성을 죽이는 전체주의적인 집단의식의 발현이 아니다. 그것은 개체의 특성을 살리면서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커다란 자율적인 중심을 얘기한다. ‘생명’이 낳게 되는 ‘다음 생명’은 바로 이와 관련한다는 것이다.

4. 사랑, 존재의 진화를 성숙케 하는 창조적 에너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놀랍게도 떼이야르는 '사랑'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만 사랑하지 않는다. 포유류에게도 모성애는 있으며, 하찮은 미생물에게도 사랑은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심지어 사랑은 물질의 미세한 분자에게도 있는 것이란다. 단지 그것이 낮은 단계로 갈수록 희미하거나 모호하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사랑이라는 것이 사람에게만 있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사랑이란 다름 아닌 나와 타자가 조화롭게 하나가 되려는 욕구다. 일반적으로 과학에서 말하는 끌어당기는 힘, 곧 '중력'이란 사물의 바깥에서 본 현상만을 얘기하며, 이에 상응하는 사물의 안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 사랑함으로서 결국은 '큰 사람'이 될 수 있다. 중력은 사랑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 에너지야말로 생명의 진화를 가능케 하는 창조적 힘인 것이다.

그렇기에 떼이야르가 보는 개체의 생명은 개체의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명'으로 이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는 그 자신의 불완전함을 사랑으로 극복하여 우주적 그리스도를 형성하는 것이다. 떼이야르가 생각하는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다.

나의 참다운 모습을 살리면서 전체와 조화롭게 공존하는 그러한 정신의 합일점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적 자아와 완벽하게 합일되는 차원이다. 이것은 나와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가 됨을 의미하는 지평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운데서 사랑으로 교통하는 차원인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 세계는 새 하늘 새 땅이 전혀 새로운 세계로 태동될 것이며, 우리 자신도 지금과는 다른 존재로 화하여 있을 것이다. 마치 분자가 결합하여 개체인 분자 그 자신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세포하나를 출현시켰듯이 말이다.

5. 인류의 치명적 독인 낙관주의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진화를 얘기하는 떼이야르의 사상이 한편으로 지나친 '낙관주의'에 기울어 있지 않나 생각할 수 있겠다. 분명 인간의 비극적 가능성들을 염두에 두지 않는 낙관주의는 인류의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떼이야르는 이르기를, 오메가 포인트의 성취는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가 작동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거부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배제해선 안 된다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오메가 포인트의 성취는 존재의 노력여하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분명히 '자율적인 중심점'이기 때문에, 존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관계적 지평에서 연결되어 있는 인류 전체를 파멸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류의 미래는 나 자신의 책임성과 항상 연관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나의 삶에 있어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곧 전체 인류의 미래와 진화에 관계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있는 거대한 이 우주적 진화에는 존재의 책임성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고 하겠다.

6. 떼이야르 사상의 학문적 평가

이러한 떼이야르의 사상은 진화론적인 과학 사상을 얘기하면서도 그것은 신학과 철학의 파트에까지 닿아있다. 사실 떼이야르의 사후에도 한동안 그의 사상은 학문적 주소를 찾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떼이야르의 진화론적 사상은 전문적인 과학자의 눈으로 볼 때 과학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신비적이거나 사변적으로 보이고, 그렇다고 종교인이나 신학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신학 사상이라기보다 불경스런 생물학인 진화론에 치중한 것 같으며, 철학자의 눈으로 볼 때도 철학으로 인정하자니 철학사에 이같이 생물학과 지질학과 기독론이 짬뽕된 특출난 사상이 일찍이 없었기 때문에, 도무지 그의 학문에 대해 번지수를 매기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만큼 떼이야르 사상은 당시로선 독특하면서도 전체 학문을 아우르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의 종교적 신앙은 과학적 사유를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과학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러한 합리적 사유의 끝에는 언제나 비합리적인 궁극성과 맞닿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떼이야르의 사상을 과정(過程)사상에 포함시켜 평가하기도 한다. 떼이야르는 우선 기본적으로 이 우주를 유기체적 사태로 본다는 사실이다. 떼이야르가 보는 이 우주는 하나이기 때문에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현상이든 그 뿌리는 우주 전체와 관련이 있다고 얘기한다. 이 우주의 관계망에서 그 어느 것도 따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실체란 있을 수 없다.

이 우주에 단 한 번의 핵과 전자가 출현하여 수십억 년을 거쳐 서서히 진화해온 물질은 점점 조직화·복잡화의 단계를 거치며, 이 지구상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켰다. 이것은 물질의 진화 속에 '얼'(=의식)이라는 것이 항상 내재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떼이야르는 사물의 바깥은 물질의 복잡화로 나타나며, 그 속에서 발현되는 사물의 안은 '정신'으로 본 것이다.

자연과학은 그때까지도 사물의 바깥만 살필 줄 알았지, 사물의 안은 들여다 볼 생각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침데기'처럼 내색은 하지 않지만, 분명 물질에는 안이 있다는 게 그 자신에게는 굽힐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모든 존재 사물의 안과 밖을 말하는 떼이야르는 항상 이 두 가지 측면을 갖고서 총체적으로 이 우주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7. 성서문자주의와 창조론자들의 착각

오늘날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창조론자들은 물질의 진화라는 패러다임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물질의 진화는 조직화·복잡화의 법칙과 관련하는데, 이것은 소위 말하는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되는 발상이라는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은 에너지의 질적 쇠퇴를 말한 법칙인데, 이것은 운동하고 있는 물체에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그 물체는 점점 그 운동성을 상실해 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달리는 자동차가 언제나 달릴 수만은 없으며, 계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는 한 그 자동차는 정지하고 말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은 곧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과 상응하는 개념이다. 즉 물질은 자연적인 반응으로 인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무질서해지는 쪽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열역학 제2법칙으로 인해 떼이야르의 진화론적 패러다임은 치명적인 오류를 안고 있는 사유체계가 되는가?

천만에! 20세기 첨단 과학이 밝혀낸 지성의 빛은 생명계와 같은 개방계에 있어서는 오히려 엔트로피가 감소하고 열역학 제2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노벨과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일리아 프리고진(Ilya Prigogine)의 명저인「혼돈으로부터의 질서」(1984)에도 상세하게 잘 나타나 있다.

떼이야르는 물질의 진화가 엔트로피 법칙에 맞설 수 있는 이유는 사물의 '안'인 얼의 존재 때문이라고 말한다. 진화의 메커니즘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하며, 그 얼은 사물 '밖'의 조직화·복잡화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오늘날 첨단의 과학인 양자 물리학의 세계에서도 물질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과학자들은 그것이 물질인지 비물질인지조차 헷갈린다고 고백한다. 놀랍게도 뉴턴 패러다임이 붕괴된 이후의 현대 물리과학은 오히려 물질에서 정신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창조론자들이 일면 똑똑해 보이는 소리를 한 것 같지만, 오히려 이들의 주장이야말로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사상임을 알아야 한다. 알다시피 창조론은 성서의 창세기에 나타난 문자 그대로를 역사적 사실로 주장하여 하나님이 뚝딱 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에 나타난 구절들을 우리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으로 이해해야지, 그것을 실제 사실로 보는 것은 참으로 가소롭고도 무지한 유아기적 발상에 불과하다.

설령 하나님이 뚝딱 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치자. 그렇게 쉽게 만들 거였으면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히려 수백억 년 동안에 수십억 번의 진화를 거듭하여 겨우 인간의 생명 하나가 태동하였다는 사실 쪽에 더 진중한 무게가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고귀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이리라. 놀랍게도 '나'라는 개체의 생명은 지금까지의 모든 우주 생명의 기운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존재에 생명의 존엄성과 그 자신의 섭리를 불어넣으시고 계신다는 놀라운 은총이 발견된다고 보는 것이다.

요컨대 떼이야르의 주장은 물질의 우연적인 진화는 바로 필연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결부된 것이라고 보았다. 성서문자주의자들이나 창조론자들이 현대과학의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마냥 종교와 맞지 않는다고 보거나 신을 부정한다고만 생각해버리는, 그 생각과 신앙의 짧음에서 기인한다. 사실상 이점은 근본적으로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치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8. 모든 만물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떼이야르의 신관은 범신론인가? 아니다! 범신론적이지만 범신론은 아니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그것은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이라고 표현해야 옳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제자인 찰스 하트숀(Charles Hartshorne)의 용어이기도 한데, 하나님은 모든 만물에 내재해 있으면서 동시에 모든 만물을 초월해 계신 분이라는 것이다. 성서에서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며,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신다"는 에베소서 4장 6절의 말씀은 범재신론의 가장 정확한 표현이기도 하다.

현실 세계의 특성에 대한 사려와 함께 시작하는 어떠한 증명도 이 세계의 현실성 이상으로 올라갈 수는 없으며, 그것은 다만 경험되는 이 세계 안에서 드러난 모든 요인만을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지극히 과학적으로만 발견할 수 있는 신의 양태는 내재적 신이지 전적인 초월적 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떼이야르는 세계에 내재하는 '얼'이라는 것의 궁극적 시원이 당시 과학에서는 발견되진 않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성육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분명 하나님은 육으로 오셨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돌들이 소리쳤을 게다. 그리고서는 우리 모든 인간에게 하나의 커다란 '자율적인 중심점'을 제공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신과 인간의 화해와 통합의 장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통한 물질에 내재된 '얼의 신적 완성'을 뜻한다.

9. 떼이야르 사상의 현대적 의미

떼이야르의 사상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그의 사상은 서양의 사상사에서 갑론을박하며 싸워왔던 정신이냐 물질이냐의 논쟁에도,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는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도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사변적인 관념론이나 물질을 먼저 내세우는 유물론이나 다들 대답의 반만 갖고 있는 셈이기에 둘 다 틀렸다고 봐야 한다. 이에 대해 떼이야르는 정신과 물질은 사물의 안과 밖의 모습일 뿐이며, 물질의 진화는 곧 궁극적으로 신의 창조사역이라고 못 박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의 많은 과학자들은 과학을 넘는 종교로 귀의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명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 환경문제를 중요시하는 생태학에도 여러 가지 사상적 근거를 안겨준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그냥 창조된 것이 아니라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설치고 비바람이 부는 인고의 세월을 거쳐서 잉태되는 것이기에, 그 생명 하나하나가 모두 다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저 들녘의 이름 모를 꽃 하나에도 이 우주의 숨결과 생명의 날줄 씨줄들이 얽혀있다. 역으로, 흘러가는 저 강물이 오염되면 우리 자신도 오염된다는 사실도 인지시켜 준다. 왜냐하면 나와 이 우주는 하나로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세계의 문제는 우리 몸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가이아'GAIA라는 총체적인 이 지구 환경은 살아있는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이며, 그것은 우리가 얘기하는 '얼'이라는 것을 실제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구가 숨을 쉰다"는 표현이 마냥 지구를 단순히 의인화시킨 통속적 문장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지구는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부터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귀가 있어도 대지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에겐 화 있으리라!

무엇보다 떼이야르의 사상은 우리에게 고귀한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사랑'이라는 것이 연가풍의 시(詩)나 멜로물 영화에나 붙는 딱지가 아니라, 과학의 세계에서도 정말로 실재하는 창조적 에너지라는 점이다. 그것은 물질의 진화를 가능케 하는 세계 안에서 신의 기능이다.

존재는 서로 사랑함으로 인해서 존재 자신의 불완전성을 극복할 수 있다. 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명령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하는 것만이 인류의 살길이요 거듭나는 길이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인류는 '진보'한다기보다 인류는 그저 '생존'할 뿐이다. 즉 인류의 진화는 인류의 생존과 바로 직결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자신의 생존에 대한 욕구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살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는.

특히 현재의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서로가 서로를 돕지 않으면 결국 우리 자신도 도태되고 만다는 현실을 아주 잘 말해준다. 내가 없으면 타자도 없겠지만 타자도 없으면 '나'라는 존재도 무의미하다. 사랑은 그렇게 나와 타자를 이어주며, 서로를 완성시킨다.

10. 나오며 : 사랑으로

   

▲ 'Pierre Teilhard de Chardin'(1881~1955) 삽화

나는 확신한다.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소외된 이웃의 아픔을 느낄 수 있으며,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그들을 위해 투쟁할 수 있다.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분단의 아픔과 통일을 외칠 수 있으며,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인류의 평화를 위해 봉사할 수 있다.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한 톨의 밥알도 남기지 않으며,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한 자락 바람과 한 줌의 햇빛으로도 아름다운 시를 읊을 수 있다. 그리고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이 우주 세계에 충만한 신의 은총에 전율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사랑만이….

(이외 '진화냐 창조냐'의 문제는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출판하는 월간 <기독교사상>1997년 2월호 "특집-창조신앙의 바른 이해를 위하여"에 실려 있는 여러 학자들의 글을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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